2014년 7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32호로 지정되었다
조성시기가 신라 선덕여왕때라면 1천년이 훨씬 넘은 것이고
탑의 양식으로 보아서 고려시대를 조성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해도 1천년은 되는 것이다
처음 사리를 모시면서 그때 바로 탑이 세워졌는지 그후 어느시기에 세워졌는지 모르겠지만
1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겪으면서도 바닥에 연꽃무늬도 선명한채로 의연히 서 있는 봉정암 불사리탑,
셋째날 소청을 거쳐 대청봉에 오른 이야기는 요기에 http://blog.daum.net/tkfkd1919/5977499
봉정암 올라가서 경내로 쭉 들어가면 첫번째로 마주 치게 되는곳 , 공양간?이다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 까지를 계획하고 6월 26일 일요일 집을 나서서 수렴동 대피소에서 1박하고
두번째날인 27일 오전 7시쯤에 수렴동 대피소를 출발 해서 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봉정암에 도착했다
수렴동에서 봉정암까지 5,9킬로인데 길이 편하지 않으니 예상하기를 5~ 5시간 30분으로 계산 했었다
가면서 할아버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예상보다 더 많이 쉬어 가고 천천히 갔는데도 예상했던 시간을 넘기지는 않았다
부지런히 갔다면 4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엇을 것 같다
3박 4일 여행인데 가방이 무거우면 늙은이 체력에 감당이 안되겠어서 먹을 것을 최소한만 가지고 가고
이날은 봉정암에서 점심 공양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갔었는데
도착해 보니 공양간이 한산해서는 늦어서 못 먹는가 하고 종무실에 가서 이야기 하니 흔쾌히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공양간에는 밥과 미역국이 따끈하게 보온솥에 준비되어 있었다, 오이무침과 함께,,
우선 생리적인 것 해결하고 씻는 곳에 가서 땀 좀 씻고 먹는 것 부터 해결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지만 이 날은 부처님께 인사도 뱃속을 채운후에 하기로 하고 할배와 들이 양껏 퍼다가 맛나게 먹고,,
설악에서 3박4일동안 끼니를 해결했던 이야기를 들은 우리딸은
다니면서 먹는 걸 잘 먹어야 하는데 밥을 좋은 것으로 사먹지 왜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 댕겼느냐고,,,ㅎㅎ
뱃속을 채운후에 사리탑부터 가 보기로 했다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보고 싶었지만 쉽게 마음을 내지 못 했던 곳
불자라면 전국에서 80넘은 노인들도 부처님께 공양할 것을 짊어지고 먼 길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참배하러 온다는 곳
지난 가을부터 벼르다 이제 생전 처음 가 보게 된 곳
우리는 공양 올릴 것을 가져갈 엄두도 못내고 겨우 내뱃속 채울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 가는데도 배낭무게가 천근이었으니
나는 날라리 불자인게 분명해,,
설악을 오르고 봉정암을 참배했던 이들의 산행기를 보면 한결같이
사리탑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고,,죽음이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해서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설악에서 이쯤이야 뭐 고난의 길도 아니더구만,,
멀고 먼 옛날에 길도 없고 숲이 우거지고 산짐승들이 장악하고 있었을 이런 곳에
길을 내고 탑을 세우고 부처님을 모실 전각을 세우고 했던 노고를 생각하면
잘 닦여진 길로 오를 수 있는 우리는
불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생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사람이 길가다 옷깃 한번 스치는 인연도 500생의 인연이 있어서 라는데
나는 지금 몇번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전생에 이곳을 왔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생에서 이런 곳을 오를수 있게 아직 건강하고 인연지어진 것에 감사할 뿐이다
웬쪽에 표지판이 있는 옆 계단으로 가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라고
오세암에서 봉정암을 오는 길도 험한 길이라던데 다음번에는 봉정암을 거쳐 오세암으로 꼭 하산해 보고 싶다
도전이라는 것은 어려울 수록 보람이 있을 것이니,,
많은 산객이나 불자들의 글을 통해 이곳의 절경을 익히 들었던 이 곳
길 나선지 이틀째이고 오늘도 험한 길을 달려 왔지만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게 인생이니
백팔배는 올려야 하는데 몸이 따라 줄지 모르니 하는데 까지 해 보자 하고 시작
쉬엄 쉬엄 백팔배를 무사히? 마친후에야 주변을 둘러 보았다
탑은 기단 없이 오층으로 올려진 오층 석탑이라는데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큰 바위덩어리 위에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바닥 돌 위에 연꽃문양을 새겨 탑을 바치고
크지도 작지도 않고 치장이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하고 간결하면서 주변산세를 압도 하지도 않고 경관을 거스르지도 않았으며
인공 조형물인 탑이 자연 조형물들보다 도드라져 보이지도 않게 조성되었는데
예술적인 것이나 학술적인 것이나 그런 것은 잘 모르는 내 눈엔 그냥 소박하고 친근해 보인다는 느낌,
사람과 자연을 압도하는 어마 어마하게 큰 크기가 아니어서 좋게 보였다
조성 당시가 옛날이니 인공 장비가 없이 사람의 힘 만으로 해야 했으니 크게 하지 못했을것이란 생각도 있기는 하지만
옛사람들의 겸손함이 자연보다 도드라져 보이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다
누가 더 큰가 내기 하듯이 엄청 크게 하는것에 의미를 두는 요즘 종교인들이 헤아렸으면 하는 부분이다
다른 분들은 정좌하고 앉아 열심히 기도 올리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는 탑에 친근한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아두느라 바라 보고만 있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중에 뇌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알려진 봉정암 불사리탑
ㅡ한용운이 쓴 『 백담사사적기 』 (1923년)에 수록된「봉정암중수기」(1781년)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에서 얻은 석가불의 사리 7과가 이 탑에 봉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봉정암은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법흥사와 함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ㅡ
그러고 보면 나는 5대 적멸보궁중에서 세곳을 가 보았네
오래전에 가보았던 상원사, 여행사 상품으로 가보았던 정암사
정암사에 갔을때는 할배의 엄살로 수마노탑에 못갈뻔 한 것을 내 고집으로 가니 할배도 따라 왔었고
탑에서도 사람들 다 내려 갔다고 어린애처럼 보채서는 오래동안 살펴보지도 못하고 겨우 사진만 몇 컷 담고 내려와야 했었는데,,
봉정암을 가 본 많은이들이 사찰의 터도 탑의 위치도 절경이고 명당이라 한다
지금처럼 방안에 앉아서도 전국의 동네 골목까지 확인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통신이 발달해서 소문이 빨랐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두발로 걸어서 확인 해야 했을 옛날 옛적,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엔 이곳에도 호랑이도 있었을 것인데
자장율사 라는 선승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산을 누비고 다녀서 이런 곳을 찾아 냈을까
설악에 많은 계곡과 봉우리 중에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같이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도 오르기 힘든 험한 산길을 그분은 많은 설악의 산세들을 다 둘러보고 이곳으로 정했던 것일까
그분들은 어떻게 무슨 장비로 이 험한 산을 오르고 내릴 수 있었을까,,
이 탑이 해체 복원되었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으니
정말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근세에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해도 절경을 품은 깊은 산에 1천년이넘는 세월을 자리를 지켜온 것 만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전쟁으로 사찰은 페허가 되었는데도 사리탑은 무사해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겠지만,,
그러고 보면 전국 산하에 경관이 수려한 곳에는 고찰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리탑엔 밤새 불이 밝혀져 있고 불자들은 밤새 법당과 사리탑을 오가며 기도하는데
나는 배정받은 방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불탑을 바라보며 잠을 청하고
이 날 하늘은 구름이 뒤덮여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니 밤중에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다시 간다면 달이 뜨는 밤에 가고 싶다
저런 불빛들로 인해 별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달빛까지는 가리지 못할 것이고
달빛에 비친 산사와 탑은 어떤 모습을 만들어 낼지 ,,
밤새 밝혀져 있는 이 불은 소청 대피소에서도 보였다
지금이야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혔지만 예전에는 별빛과 달빛만이 비치는 깊은 산속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을 맨몸으로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수많은 고통받는 이들의 사연을 들었을 것이고
변해 가는 세상을 보았을 것이니
조그마한 이 탑이 간직한 사연들은 탑의 크기와 무게의 몇만배는 될 것이다
문득 돌도 삭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탑은 인위적으로 훼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500년?, 천년?, 만년?,
내 후손중에 누구라도 이곳에 와서 나의 발자취를 기억할 이가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돤 불교유적은 어디에 있으며 그 년한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렇게 인공적으로 조명을 하는 것이 이조형물의 수명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궁금한 것도 많은 할매~~
이 봉우리도 이름이 있을텐데
봉정암 불사리탑을 지키는 곰바위 라는데
용아장성을 뒤로 하고 서 있다
이곳에서는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공룡능선이라고
내나이 60만 되었어도, 지금이라도 옆지기인 할아버지가 환자만 아니어도 도전해 보고 싶은 곳,,
수렴동 계곡에서 봉정암으로 올라오는 구간에 바위 너럭길과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
계단이 하도 높아보여 세어가며 올랐는데 107계단으로 세었다 108인데 잘못 센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옆에 너력길은 난간을 잡고 게걸음으로 내리고 오르고
그러나 봉정암에 오르는 길은 길이 험해서 힘들었던게 아니고
길이 멀어서 힘들었다
백담사에서도 10여 킬로나 되니,,
그런데 계산해 보면 4킬로가 10리 이니 10 여킬로면 30리도 안되는 길인데
시골에서 예전에 30리길을 걸어 왕복 60리 길 장에 갔다 오는 것은 한나절 정도 걸렸었는데
산악길과 평지 길에 차이가 이렇게 크니,,,
자장율사 할버지 스님께서는 이렇게 길고 긴 계곡 꼭대기에 부처님을 모셔야 했는지
그나마 용아장성 꼭대기가 아닌 것을 감사 해야 하는 건지,,에휴~~
봉정암 1,6킬로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이곳부터 단단히 마음먹고 올라야 한다
완만했던 길이 고도를 높이느라고 급경사 계단에 다듬어 지지 않은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얼켜 있는 길이기에,
아래 있는 봉정교를 지나면서 길의 가파름이 더 심해 지고
돌덩리들이 뒤엉켜 있는 길에 비해 가팔라 보이는 계단길은 수월한 편이고
이곳까지도 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계곡이 계속 옆에 있어서 시원한 물소리 들으며 가는 것도 좋았고
봉정암에 점심 공양시간인 열두시쯤에 도착 했으면 하고 나선 길이지만
머리가 띵하다고 했던 할배는 뒷목도 뻐근하다더니 귀울림도 심해 졌다고 해서는
배낭속에 가지고 가는 비상식량으로 점심먹으면서 천천히 하루종일 가자고 다독이면서도
내켜 하지 않는 할배를 내 고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만일 여길 오르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남은 생에 평생을 후회 하게 될 것 같아 마음속은 편하지 않았었고
봉정얌 0,5킬로
많은 이들이 마의 구간이라 하는 이른바 갈딱고개 앞에 섰다
그런데 500미터 구간이 전부 이런 길은 아니고 어려운 길은 절반정도
두어곳 철계단이 있었지만 길도 아닌 것 같은 급경사 바위덩이 사이를 오르면서 지금 오르는 것보다 내려갈 일이 더 걱정이 되었고
길을 더 이상 정비할 수 없었다면 로프라도 두 줄 정도 매어 놓앗으면 수월할텐데 투덜 대면서
봉정암측에서 일부러 이런 구간을 편리하게 정비하지 않고 그냥 두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고,,,ㅎ
내려을때는 뒷걸음으로 내려 오던가 가지고 있는 스틱을 밧줄삼아 한사람이 잡고 있고 한사람은 잡고 내려오고 그렇게 할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않고도 궁둥이로 뭉기적 거리며 잘 내려 왔다
집에서 떠날때 생각에는 우리 말고도 오르고 내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어쩔수 없는 순간에는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도 계산에 두었는데
단풍철이 아닌 설악은, 더구나 평일인 이 날들은 오르는 분도 내리는 분도 많지 않았다
이곳을 오르며 보였던 풍경도 수려 했는데 올라갈때는 힘들고 시간 단축하느라 사진을 거의 안찍고 내려 올때 찍으려고 했었는데
소청에서 충전 하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봉정암에서는 충전 하는곳이 없어서는
카메라 밧데리가 방전되어 수려한 계곡이나 폭포들을 사진으로 많이 남기지 못해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에 또 갈 것인데 뭐~~ㅎ
ㅡ봉정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인 백담사의 말사이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원효대사,보조국사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대사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모든 전각들은 그 후에 재건된 것이라 한다ㅡ
봉정암 연혁
가, 신라시대
644년 선덕여왕 1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다
677년 문무왕 7년 원효대사가 머물다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나, 고려시대
188년 명종 18년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 참배했다
다, 조선시대 이후
1518년 중종 13년 환적스님이 세번째 중건불사를 했다
1548년 명종 3년 동운선사가 절을 고쳐 지었다
1632년 인조 10년 설정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탱화를 새로 봉안 배탑대를 만들고 누각을 지었다
1780년 정조 4년 계심스님이 여섯번째 중건을 했다
1870년 고종 7년 인공, 수산 두 스님이 일곱번째 중창을 했다.
1960년 6,25 전쟁으로 전소된 봉정암을 법련스님이 1000일 기도끝에 법당과 요사채를 마련했다
1천여년 전 불사리 탑과 사찰이 처음 조성되었을 당시에는 이곳에 길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니
인가에서 20킬로는 떨어져 있었을 험한 산길을 일용할 양식을 짊어지고 오르고 내리고하며
전각과 탑을 세우는 공력도 해야 했을 옛 고승들은 정말로 깊은 佛心이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웠을 일을 해 내었던 것
지금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 길들은 그때에 비하면 신작로 일 듯,,
불교든 기독교이던 지금의 한국 종교는 ,,,??
웬쪽으로 바위아래 보이는 전각은 새로 짓는 대법당인듯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것 같고
아래쪽 전각은 종무소가 있는, 우리가 하룻밤 유숙 했던 곳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보니 창문으로 불을 밝혀 환한 사리탑이 밤새 보였고,,
이런 지형의 산세에 사찰이 들어 서 있으니 전각 하나 갈려면 전부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새로 짓는 법당위로 쭈욱 올려보면 정상 봉우리 아래에 소청대피소가 보인다
저 위에 보이는 소청 대피소
방에서 보면 바람벽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저곳을 올라가야 하는데 망설여 졌고 후회도 쪼~끔 되었고
그래도 날아 오를줄도 모르고 축지법도 못 배웠으니 한발 한발 도전해 볼 밖에,,
공양간이 있는 곳에서 계단을 내려 가서 있는 세면장
계곡도 아니고 이 산 꼭대기에 먹을 물이라도 나오는게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지 싶고
건물안 세면장엔 물이 안나오고 마당에만 졸졸 흐르는 물을 대야에 받아서 세면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씻어야 했고
비누 샴푸 치약도 사용하지 말라는 데도 여성분들은 전부 크린싱 크림을 사용해 세수들을 했고 치약도 전부 사용하고
나는 천일염 소금을 가져 가서 그것을 컵에 소금물 풀어서 산에 머무르는 3박 4일동안 소금 양치만 했고
비누 없는 물세수만 했었다
대청봉을 찍고 봉정암에서 하룻밤 숙박하려고 내려오는 날 봉정암엔 헬기가 떳다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으니 모든 물자 수송을 헬기로 하는 듯
먹을 것을 올려오는 일도 쓰레기등 버려야한 것들도 모두 헬기를 이용해 가져오고 가져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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