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향기

경복궁 이야기 강녕전 康寧殿 1995년 복원

L일순 2013. 12. 30. 10:00

 

1868년 흥선대원군이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 하면서
고대 중국의 예법을 조선왕실의 전통이나 현실과 조화시켜 전체적으로 규칙적 배치를 따르면서

부분적인 변화와 파격을 가미 하는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여년간 잡초 우거진 빈터로 남아 있던 자리에 대원군의 결단으로 재건된 경복궁은

14만평의 광활한 대지에 약 3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하나에 작은 도시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어려운 재정상태를  무릅쓰고 중건이 완료된 경복궁의  총규모는 7,481칸이고 공사 비용은 모두 770만 냥이 들었다고 한다

 

중심부에 정무공간을 두고 좌우 뒤편으로 왕족의 생활공간, 그리고 곳곳에 정원 시설을 배열했다
일제 강점기에 85%에 달하는 건물들이 철거되어 중심부에 일부 건물들만 남았고
광화문을 비롯한 외전 일부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의 정면을 막고 있었다
1990년 부터 복원 사업이 구준히 진행되어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원래의 광화문과 흥례문 그리고  행각을 복원했고 왕과 왕비의 침전 및 왕세자가 기거한 동궁도 다시 세워

1차 복원 계획은 끝났고 2착복원을 계획중이라 한다

 

지금은 전각과 전각사이에 빈터가 많이 보이는데 그당시에는 건물이 빼꼭이 들어차 있었다 한다

지금 상태로 보면 후궁들의 전각도 없고 상궁 내인들의 처소도 없다

 

경복궁 최초개방일 1954년 3월 1일

 

 

경복궁 이야기 다섯 번 째 수정전 이야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7
 

정전 이었던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달리 강녕전은 침전으로 온돌이 깔려있다.

 

근정전 이야기 요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2

사정전 이야기 요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4


조선 전기에는 중궁전과 임금의 방이 한 건물에 있었다 한다,  조선 후기부터  건물을 새로 만들어 중궁전을 분리해서 사용하였다 한다
이것은 유교적 사상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강녕전에 월대와  마루가 넓은 것은 조현례라는 폐백이 이루어지거나 내연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앞에 넓은 월대에서는 무희가 공연을 하였다.
내연은 주로 보는 것이고 외연이 있음으로 해서 남녀가 나누어서 이루어졌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세자와 비 빈 들의 석고대죄도 강녕전 월대에서 있었던 일이라 한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은 동서 양측에 우물정자형으로 9개의 방을 두었고 그중 가운데 방에서 왕이 침수하고

주변 8개방에는 상궁들이 입직 하였다
침전의 실내에는 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가구를 들여놓지 않았다
강녕전 부속건물로는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등이 있다

 

강녕전 일곽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채의 전각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오행(五行)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강녕전 정문인 향오문 밖에 있는 사정전ㆍ만춘전ㆍ천추전 세 채의 편전 일곽은, 강녕전 일곽의  다섯 채와 더불어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그리고 경복궁의 중추인 정전ㆍ편전ㆍ침전이 한 채, 세 채, 다섯 채의 순서로 배치됨으로써
 동양의 천문도(天文圖), 즉 북극성(北極星)ㆍ삼광지정(三光之庭)ㆍ오제좌(五帝座)의 별자리를 본뜬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고,,

 

 

강녕전 일곽은 태조의 경복궁 창건 당시에 건립이 됐으나 명종 때 불에 타 다시 지었다.
 또다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복원됐다.
고종 13년 1876년  대화재로 강녕전 및 새로 지은 교태전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때 강녕전, 교태전, 인지당, 건순각, 자미당, 덕선당, 자경전, 양경당, 복안당 ,통희당, 연생전 ,경서전, 함원전, 흠경각 등
 15채의 건물 830여칸이 소실되었다 한다
확실하지 않으나 교태전에서 화약이 폭팔한 것 같았다는 설도 있고 대원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음모설도 있었다 한다,,원체 대형 화재였으니,,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겨 지냈고 고종 25년  1888년에 교태전 자경정 등과 함께 중건 되어 임금이 창덕궁에서 옮겨 왔으나

 고종괴 명성황후는 건청궁에 머물렀고 강녕전은 각국공사를 영접하거나 진연을 여는등 의전행사장으로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 후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난 화재로 수백칸의 건물들이 사라졌고  대조전과 가까이 있던 희정당도 함께 전소 되었다
불타버린 창덕궁 전각을 다시 짓는데 경복궁에 있는 건물을 헐어다 다시 지었다 한다
강녕전은 희정당, 교태전은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그렇게 되었으니 원래 창덕궁에 있었던 대조전 희정당의 모습과도 다르고 경복궁 강녕전 교태전의 모습과도 다르게 변형 되었다 한다


 

강녕전 대청마루

 

강녕전 툇마루

 

 

 

강녕전 측면에 있는 아궁이인데  나무로 불을 때지 않았고 숯을 사용하기도 했다한다

 

양의문 행각에 붙여 지어진 강녕전 굴뚝

 

강녕전 굴뚝인데 강녕전 뒷벽에 바짝 있지 않고 건물 뒷쪽 마당을 건너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 행각에 기대어 지어 졌다

붉은색 전돌로 쌓아 올린 아름다운 굴뚝에 무늬와 함께 웬쪽은 ,만 수 무 강 오른쪽은 영 세 만 세 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본 건물 바로  뒤에 굴뚝을 두지 않고 연도가 뒷마당을 지나게 설계된 굴뚝이 자경당, 교태전 강녕전 굴뚝이다

오른쪽 강녕전  건물에서 웬쪽 양의문 행각까지 마당 속으로 연도가 설계되어 있을 것이니

이 곳 마당은 겨울에 눈이 와도 빨리 녹고 얼지 않을까,,,궁금

지금은 복원된 것이라 저 땅속에 연도가 있는지,  강녕전 침전에  구들이 놓였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쉽다,,

 

만수무강萬壽無彊,,,,,,,,,,,,,,,,,,,,,,,,,,,,,,,,,,,,,,,,,영세만세永世萬歲

에고,,,저는 이게 글자인 줄도 모르고 사진만 꾹 꾹 찍어 왔는데 자료를 찾다보니 글자라네요

한자를 배웠어야 하는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게 천만 다행입니당,,ㅎ

 

 

강녕전은 좌우에 각각 연생전과 경성전을 거느리고 있는데, 서향한 연생전을 동소침, 동향한 경성전을 서소침이라고 한다.
 또한 연생전의 북쪽에는 연길당이, 경성전의 북쪽에는 응지당이 자리를 잡아 동서남북 행각과 더불어 강녕전 일곽을 이룬다.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 앞쪽으로 좌우 대칭, 즉 건물 앞면이 동서로 마주보며 배치됐으며
연길당과 응지당은 남향 건물로 강녕전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치우쳐 좌우 대칭으로 앉아 있다.
 지금은 이들 다섯 전각들이 떨어져 있으나,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 및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에 의하면
 원래는 모두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이어져 있었다.

 즉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 앞 툇간과,  연길당과 응지당은 강녕전 뒤 툇간과 각각 연결돼 있었다.

 

경성전, 응지당, 강녕전

 

경성전   응지당

 

흠경각, 응지당, 강녕전,

 

하나의 통돌로 반지처럼 우물상부 테두리석을  제작 하여 보기 드문 아름다운 우물이라고

 

흠경각欽敬閣이란 간판이 붙은 이 건물은 농업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세종은 1438년 흠경각 건립을 명하고 여기에 옥루기륜 玉漏機輪 앙부일구仰釜日구등의
시간측정기구와 천문관측기구인 강의 강의를 만들어 설치 하였다 세종 20년 (1436)장영실에 의해서,,
흠경각에는 절기와 시간을 알리는 자동 천문 물시계로 알려진 옥루기윤玉루機輪이 설치 되었다

 

동소침이었던 서향한 연생전

 

연생전의 북쪽에 있는 연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