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향기

경복궁 이야기 네번째 자경전보물 809호, 신정익황후 이야기

L일순 2013. 12. 16. 10:01

 

 

경복궁 이야기가 여러편으로 포스팅 되어 이곳에 들어 오시는 분은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여려편으로 올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담아온 전각 하나 하나에  사연이 너무 많고 제생각에는 그게 소중해서  그냥 대강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또 제 손자 손녀들이 후일에 이런 자료가 필요할때 이 곳 한 곳에서도 자료수집이 가능하게 하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몇 편이 더 올려질 것입니다

자료 찾느라고 힘들지만 저도 새로 배우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현종(24대)의 어머니 신정익황후 조대비는 고종의 등극의 결정적인 기여를 한 어른이다

이에 보답하는 마음이었을까  흥선 대원군은 조대비를 위한 거처를 교태전 동쪽에 궁궐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었다 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 중건했다.

 

중앙에는 중심건물인 자경전을 두었고 서북향에  복안당이라는 온돌 침실을 두어 겨울에 사용하게 하였다

동남쪽에는 다락집(누마루)인 청연루淸燕樓를 두어 여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여기에 12칸에 협경당을 지어 연결되게 하였다

주변에는 수십칸에 행각 담장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고,,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 나비 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식물 등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수있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대비전이고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식정보센터에서 인용)

 

경복궁 이야기 세 번 째 사정전 이야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4

 

 

자경전 보물 809호

 

이 아름다운 전각의 주인공인 신정익황후는 효명세자(추존 문조ㅡ익종)의 부인이다

효명세자가 왕에 오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신정왕후는 중전이 되지 못하고 대비가 된 분이다

효명 세자는 23대 순조와 순원황후의  장남이고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니 신정황후는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정조대왕의 손자 며느리이다

 

19대 임금이었던 숙종이후에 경종, 영조, 정조, 순조는 정궁의 혈손이 아니고 후궁의 자손이었기에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황후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을때  대궐 안팍에서 경사가 컷을 것으로 짐작된다

총명하기도 해서 20세 전에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고 슬기롭고 지혜롭게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는 정치를 했다 하는데

건강하던 세자가 불시에 병을 얻어 발병한지 열흘만에 요절 했다하니 대궐은 물론 세자빈이었던 신정황후에 슬픔이 어떠 했을지,,

겨우 22살 나이에,,

 

그때 슬하에 네살된 아들을 두었으니 그가 24대 헌종이다

순조임금도 하나있던 자식을 잃은 슬픔이 컷던지 그로부터 4년후에 젊은 나이로 타계하고

겨우 여덟살인 신정황후에 아들 헌종이 보위에 오른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연이은 불행으로 슬픔에 잠겼겠으나 아들이 보위에 오른 것으로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어린 임금의 수렴첨정은 시어머니인 순원황후가 했고 아들인 헌종임금도 23세에 젊은 나이로 후사도 없이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임금이나 세자가 젊은 나이에 연이어 요절하니 왕권은 약해지고 순원왕후의 영향으로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절이니

안동김씨의 전략으로 강화도령인 철종이 보위를 이었고 그도 순원황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철종도 33세의 나이에 후사없이 요절했다

 

철종은 신정황후에 아들인 헌종 다음에 보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쥐고 있던 안동김씨와 순원황후는  철종을 손자인 헌종의 후사로 세우지 않고

순조와 순원황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리고 수렴청정을 했다

철종이 정조임금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의 손자이니 정조에게도 손자 항렬이고 아들인 순조의 후사가 되는게 항렬상으로는 맞으나

순조 이후에 신정황후에 남편인 효명세자(추존 익종왕)나 아들인 헌종이 무시되어 버린 계보이다

안동김씨에 세도와 시어머니인 순원황후에게서 이때 왕대비였던 풍양조씨 신정황후는 철저히 소외 되었음을 말해준다

 

 

철종이 죽고난후에 등장한 이가 흥선군 이하응, 

일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는 소리가 세번이나 들렸다 해서 이하응이라 했다나,,

 

안동김씨 세도가 쩌렁~ 하던 시절에 임금이 허수아비여야 자신들의 영화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똑똑해 보이는 종친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던 때이니

우리에게 알려진대로 노름쟁이 술주정뱅이로 위장하고 때를 기다렸던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은

은밀히 조대비에게 접근해 대왕대비인  신정황후와 합작으로  나이어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26대 임긍으로 올리는데 성공한다

조대비는 고종을 자신의 남편인 효명세자(익종ㅡ문조로 추존)의 양자로 입적하게 한다

신정익황후는 고종에게 삼종숙모 [叔母]가 된다

삼종형제는 아버지의 8촌 형제이니 삼종숙모는 9촌 숙모이다, 종숙從叔은 당숙 堂叔이라고도 한다

 

그때 조대비에 계산은 새 임금이 나이 어리고 그 아비인 이하응은 천하에  시정잡배로 알려졌으니  

당연히 대궐의 어른인 자신이 수렴청정을 해서 권력을 손에 쥐어볼 수 있겠다 하였겠으나 그것도 물거품이 되었다

겨우 4년간 형식적인 수렴청정을 하고 본색을 들어낸 대원궁의 의해 밀려나게 된다

후에 명성황후와의 갈등으로 그나마 양아들격인 고종을 만나기도 어려웠다니,

말년에 자경전에 갇혀서 오래사는게 욕이라고 한탄을 했다 한다

 

풍양조씨인 신정황후에 생가는 지금의 옥수동이었는데 꽤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후원이 있는 규모가 컷던 저택에는  쌍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조대비가 출생하던 날 밤에 두마리에 호랑이가 정자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쌍호정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세도가에 가문에 태어나 열두살에(1819)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대궐에 들어와 83세?로 타계하기까지

이분에 삶도 순탄 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조선왕조가 27대 까지 있었으니 임금이 27분 이었겟으나 이중에 열아홉 분이 적장자가 아니었고

임금의 평균 나이는 44세 라고,,

그나마도 영조임금이 80을 넘게 장수한 덕에 평균연령이 그 정도라도 되었지 싶다

어린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어 대비들이 수렴청정을 한 분은  모두 일곱 분

 

 

이 곳 만세문은 문이 三문이 아니고 二문이다

 

 

굴뚝 맨 윗쪽에 검은색으로 화분을 얹어놓은 것 같은 것이 연가(煙家) 그곳으로 연기가 나가는 곳

연가가 건물의 고래 수와 같다한다고래가 열개면 연가도 열 개,,

 

지정번호 보물 제810호
(1985년 1월 8일 지정)
제작시기 조선 고종 2년 (추정)
소유자 국유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景福宮慈慶殿十長生-)은 경복궁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굴뚝이다.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태양·산·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아름다운 모습의 굴뚝이 여러차례의  화재와 전란을 겪으면서도 남이있어주어  고마운 마음이고

대원군이 이런 건물을 후세에 남겨 주어 그도 고마운 일,

,

 

굴뚝은 건물 뒤쪽 외벽에 붙어있지않고 뒤곁 마당을 지나 담에 붙여 지었다

강녕전 굴뚝도 강녕전 외벽에 설치되어 있지 않고 강녕전 뒷마당을 지나 교태전 행각에 붙여지은 것과 같다

 

 

자경전 담장 안쪽

 

 

 

 

벽 전체를 아름답게 글자와 문양으로 장식했고 별도로 꽃을 수놓듯이 올린 꽃담

 

 

아름다운  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한다

 

 

 

육각형이나 네모안에 작은 꽃은 황토로 빚어 구워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육각형은 오래산다는 거북의 등을 상징하여 만든 것이고 장수를 기원하며  아름다운 꽃문양을 육각형 안에 둔 것은

부귀와 영화로운 것이 삿된 것에 시샘에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벽사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벽사 :  주술적인 신령적인 힘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려 하는 것을 말함

?,,,,,,,,,,,,,,,,,,,,,,,,,,,,,,,,,,,,,,,,,,,,,,,,,,꽃과 나비

 

매화,,,,,,,,,,,,,,,,,,,,,,,,,,,,,,,,,,,,,,,,,,,,,,모란 

매화 꽃 가지끝에 동전같이 동그란 것은 보름달이라고

그 속에 새도 한마리 있다

복숭아 ,,,,,,,,,,,,,,,,,,,,,,,,,,,,,,,,,,,,,,,,,,,,대나무

 

석류,,,,,,,,,,,,,,,,,,,,,,,,,,,,,,,,,,,,,,,,국화

 

 

꽃담에 그려진 꽃들도 모두 잎이나 줄기 꽃송이를 따로 진흙으로 빚어 구워서 붙인 것이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꽃담 사진에서도 내 무식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진을 찍을때는 위에 있는 꽃사진 웬쪽에 있는 문양이 문양인 줄만 알고 꽃사진만 찍어 왔는데 그게 글자라고,,,

나이는 먹었어도 가방끈도 짧고 한자지식도 짧으니 정자로 된 것도 읽을 수 있는 한자가 얼마되지 않는데

저런 모양으로 되어 있으니 사전 지식이 없이 간 내눈에 글자로 보였겠는가,,,,

에휴,,부끄러운 일이다

 

 

담장 오른쪽 끝에 있는 이그림은 그 옛날에 만든 것인데도 현대의 디자인이라 해도  조금도 손색없는 모양이다

문양을 넣을 구획을 나누는 것을 어쩜 저런 식으로 나눌 생각을 했을지,,,

이 꽃담을 설명한 어떤 분은 말하기를 ,

이런 것이 전부 남성들의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조선시대 그 투박한 영감들의 손에서

어찌 저런 곰살맞고 아름다운  문양이  탄생했는지 놀라운 일이라고 ,,,하는 걸 들었다 ,,,나도 동감~

이런 담장 문양은 교태전 뒷뜰 아미산에도 있다

 

 

 

자경전 뒷쪽 담장 너머 은행잎이 곱게 떨어져 쌓인 풍경이 아름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