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전修政殿 보물 제 1760호
계단과 계단 사이에 무늬가 조각된 하마석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있던게 아니고
제자리를 잃고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그냥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합니다
왕이나 왕세자가 아니고는 대궐안에서 말을 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마석에 무늬도 새겨져 있는 것 보면 아무나 사용하던 것이 아닌것으로 보여지기는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경복궁 수정전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는 것을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 되었다
조선 초기 잠시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이곳에 두었었고
이후 내각청사로 이용되었다 한다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바로 뒤에는 경회루가 있다
수정이란 의미는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 글씨는 중건 당시에 조석원 이란 분이 썻다 한다
그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까지 올랐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한다
수정전이 있는 권역은 세종임금 당시에 학문을 연구하며 주요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이자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과 궐내 각사가 있던 자리이다
궐내 각사라는 것은 왕명을 전달하고 왕실관련 업무와 시위를 관장하는 궐 안에 있는 관아(관청)를 말하는 것으로.
비서실격인 승정원, 서적편찬을 맡았던 홍문관, 궁궐을 지키는 내병조, 내금위,의료기관인 내의원, 내시들의 업무공간인 내반원,
음식을 맡아하는 사옹원,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 등 이 있던 던 자리인데 일제 강점기에 다 헐려 버려서 지금은 빈터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참고로 궐외각사는 국가의 기간 관서들로서 의정부, 의금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좌포청 등
궐밖에 있는 관청들,,
이는 세종대왕이 올곧게 바른 생각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집현전이 없어지게 된 것은 세조 즉위초에 이른바 사육신이라고 하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에서 키운 인재들이
올곧은 성정에 어린조카를 밀어내고 옥좌에 앉은 숙부인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를 인정하지 못하고
세조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그들이 모두 처단되면서 그온상이 된 집현전도 없앴다 한다
경복궁 이야기 네 번 째 자경전 이야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5
건물 4면이 벽이 없고 전부 문으로 되어 있어요
왕이 머물기도 했던 곳이니 침입자가 있을때 어느방향이던지 문이 있으니 피하기 쉽고
밖에 있던 병력이 들어오기도 쉬우라고 이렇게 지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양식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 있다 한다
수정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정 긴 장대한 건물로 이익공 양식 단층 팔작 지붕이다
수정전은 건물 외관,가구부재등 다른 궁궐내 건물에서 볼수 없는(근정전 제외) 월대를 갖춘게 특징이다
정면에 네벌대의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는데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세곳에 설치했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 계단과 차별화 시켰다
이는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전, 당 ,합, 각, 의 용도에 대한 것은 요기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22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 기단 위에는 사각 초석위에 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 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했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두어 온돌방으로 만들었고
도리방향 10칸이 모두 대청으로 트여 있으며 좌우및 후면에 퇴칸이 연결되어 있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놓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쳐준다
지붕의 용마루및 내림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 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이 도보이는 구조 라고 한다
고종 때 중건당시 수정전은 4면에 행각이둘러 있었고 남쪽에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다는데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내부벽체와 창호가 훼손 되었고
일곽도 1915가을에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세우기 위애 전초 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박람회)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모두 헐리고 본건물만 남은 것이다
그나마도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살아 남은 것,,,
수정전앞에 넓게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이 여러 궐내 각사가 있던 자리,,
세련되시고 품격있으시고 아름다우신 우리에게 해설을 해주신 이*선 님
경복궁 아미산 굴뚝 보물 제 811호
아미산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산(假山)이다.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매화, 모란, 앵두,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단 위에는 배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景福宮峨嵋山-)은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된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년(1394년)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년(1553년)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년(1867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고종 13년(1876년)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년(1888년)에 복구되었는데
이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 화재로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교태전 건물과 아미산 굴뚝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학·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
바위·새·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灰)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 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이 네 개의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화계의 조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교태전 , 자경전 , 강녕전 굴뚝은 건물의 외벽에 가까이 두지 않고
교태전은 뒷마당을 지나 뒷 정원위에 , 자경전은 뒷마당을 지나 뒷담에, 강녕전은 뒷마당을 지나 교태선 행각에 기대어 지어졌다
계단식 정원은 산을, 돌함지는 호수를, 굴뚝의 무니는 동식물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낙하담落霞潭,,,,,,,,,,,,,,,,,,,,,,,,,,,,,,,함월지涵月池
낙하담은 노을이 비친 연못,, 함월지는 달이 담긴 호수를 의미하는 것이고
작은 그릇에 만들었지만 큰 연못과 호수를 상징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기암 괴석은 높은 산을 의미하는 것이라고한다
옛날 사대부가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대궐에 한번 들어온 여인은 평생 바깥 구경을 하기 어려우니
왕비나 공주를 위해 이런 것을 만들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소 였던 듯,
향원정 보물 제 1761호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앞에 향원지(香遠池)가 있다.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개인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있다 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때 불에 태운 유해 일부를 이 연못에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향원정으로 들어가는 목책으로 된 다리인 취향교는 1873년 설치 되었다
원래 건청궁에서 나와 바로 건널 수 있게 설치된 것을 6.25 사변 후(1953) 복원하면서 관광객의 편의라는 명분으로 반대쪽에 놓았다 한다
향원지는 정자 안에서 바깥 경치를 내다보아야 그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한다
산수를 찾아서 정자를 짓는 산수정원 방식의 정자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연꽃의 향기가 멀리멀리 난다는 의미로 향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문민정부 시절 종교와 관련하여 연꽃을 모두 파 없애버렸다.한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경회루나 향원지에는 연꽃이 만발하였다고 ,,
창경궁에도 연꽃이 있었는데 6,25 이후에 들어선 어떤 정부에서 모두 파 없앴다 한다
향원정(香遠亭)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취향교(醉香橋)인데 향기에 취한다는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저 건너로 보이는 전각은 향원정 남쪽에 있는 집경당과 함화당
경복궁에서 보물로 지정된 건물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아직 올리지 않은 강녕전 교태전 건청궁 집옥재 태원전 등이 있으나 이후에 올릴 건물들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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