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사정전, 수정전, 향원정과 창덕궁에 금천교,부용정,남선재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지정
경복궁 사적 117호
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 223호
경복궁 경회루 국보 제 224호
남계원 7층석탑 국보 제 100호 고려시대
경복궁 근정전 행각 보물 제 812호
사정전 보물 제 1759호
수정전 보물 제 1760호
향원정 보물 제 1761호
경복궁 아미산 굴뚝 보물 제 811호
자경전 보물 제 809호
자경전 꽃담 보물 제 809호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제
쟈경전 십장생 글뚝 보물 제 810호
경복궁 풍기대 보물 제 847호
경복궁 만춘전 사적 117호
경복궁 이야기 첫 번 째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30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국보 제 223호
아는만큼 보인다 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고궁 나들이를 하면서 소중한 우리 옛문화, 역사, 옛건축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 갔던 것은 아니었고
단순 구경 하자는 마음에 별 깊은 생각없이 가서는 보이는 대로 꾹 꾹 눌러 사진찍고 돌아와 사진 정리를 할려고 보니
아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자료를 검색하면서 보니 근정전을 주변의 산세와 더불어 가장 웅장하고 돋보이게 하는 장소는 근정전 앞 행각의 오른쪽 귀퉁이라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 장관이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말했다 한다
위에 보이는 사진은 그 반대인 웬쪽에서 바라보며 찍었으니,,,어쩌랴 무식의 소치인 것을,,ㅎㅎ
꽃피는 봄에 다시가면 문고리 하나라도 예사로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이며 의전행사를 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근정전에선 임금이 신하들에게 새해인사를 받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무식을 했고 법이나 정책을 반포하고
사신을 맞아들이거나 잔치를 베풀고 새로운 임금 등극식을 하던 곳이라 한다
선왕이 살아있을때 새 임금의 등극은 근정전에서 하였는데 조선조 초기 이후에는 선왕이 살아있으면서 양위를 한 적이 없으니
경사스러워야할 임금의 등극식이 상중(喪中)에 이루어지는 관계로 근정전이 아닌 근정문에서 간소하게 등극식을하기도 했다고,,,,
국보 제 223호인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고,,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되었다 한다
경복궁을 법궁이라 하고 여러궁궐중의 중심 건물이었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경복궁에서 머물렀던 왕은 그리 많지 않고
또 외세의 침입과 화재로 소실되어 조선 14대 임금이었던 선조 이후에 오랜 세월 페허로 남이 있기도 하였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조선을 건국하고 개성에서 옮겨와 한양을 새도읍으로 정하고 궁궐을 짓고 했지만 왕자의 난 등으로 태조는 재위기간이 짧았고(재위기간1392~1398)
두 번 째 왕인 정종이 잠깐 머물렀으며 조선 왕권의 기초를 잡았다고 할 수 있는 태종도 왕자의 난 이후
경복궁을 비워둔채로 개성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도 창덕궁을 새로 지어 그곳에 머물렀다 한다 , 왕자의 난 기억 때문에,,,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다고,,
세종·, 문종, 단종이 경복궁에 머물렀고 즉위식도 하였으나
어린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후 이듬해 복구되었으나
38년 뒤(1592 )선조 재임시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게 되었다
난을 피해 (임진왜란) 의주까지 갔던 선조임금이 한양으로 돌아온 후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머물 곳이 없어
인수대비의 장남이고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궁궐로 사용했는데 이곳이 덕수궁이다
후에 광해군이 창덕궁을 증축하여 그곳에서 지내게 되고 왜란이후 경복궁을 복구할수가 없는 여력으로
결국 그 뒤로 많은 왕들이 창덕궁에 지내게 된다
숙종은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중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즉위 6년이 되던 해 그는 경복궁 사정전 터를 직접 찾아
"선왕(先王)의 법궁(法宮)이 황폐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니 개탄스러울 뿐이다"고 탄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궁을 다시 짓지는 못했고,
고종 4년인 1867년에 대원군이 다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270 여년 만에,,
고종이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졌으니 대원군이 그때 어려운 재정상태를 무릅쓰고 다시 짓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경복궁을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것이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895년에 궁궐 안에서(건청궁)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 이후에 순종이 즉위하였으니 점령군이었던 일제는 순종을 경복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고,,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훼손 하였으며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남아 있던 경복궁 건물을 해체했다.
어이없게도 경복궁의 멀쩡히 서있는 건물을 헐어다 창덕궁 중건 공사를 했던 것이다
참으로 파란 만장한 역사이다
흥례문(興禮門) 2001년 흥례문 지역 영제교 등 복원
경복궁 정문은 광화문이고 광화문을 지나면 흥례문
흥례문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세종 8년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 하여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인 홍례문(弘禮門)이라 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乾隆帝(건륭제)의 이름자인 '弘曆(홍력)'을 피해 흥례문(興禮門)으로 문 이름을 고치게 되었다 한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일제 총독부 건물이 있던 자리다
영제교와 근정문(勤政門)
흥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이 있고 근정문을 지나야 근정전이 있다
영제교 아래에 흐르는 물을 금천이라 했고 금천의 물은
맑고 변하지 않고 그침이 없이 흐르는 물의 근원’ 이라는 뜻인 열상진원(열上眞源)로부터 흘러 들어와 향원정 호수에 모였다가
물줄기 하나는 궁궐 안의 각종 건물들을 거쳐 흘러서 금천에 이르고 다른 한줄기는 궁궐의 외곽을 한 바퀴 휘돌아 금천에서 합류했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
일제의 의한 훼손으로 물길을 찾지못해 궁궐 건물들은 복원했으나 물길은 복원하지 못했다 한다
금천 둑위에 있는 서수는 천록(天鹿) 이라 했던 거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사슴이란 뜻일까
다리 양쪽으로 금천 이쪽 저쪽으로 네마리가 있는데 생김새나 표정이 똑같지 않고 다른 것도 있어 나중에 다시 자세히 올려보기로 한다
근정전 앞에서 바라본 근정문, 근정문 및 행각 보물 812호
근정전 행각은 남문인 근정문, 북문인 사정문(思政門) 이 있고 동쪽으로는 융문루(隆文樓), 서쪽으로는 융무루(隆武樓) 를 두었으며
사방으로 이어지는 행각(行閣)이 근정전을 두르고 있다.
지금 현시대에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에 눈이 익은 우리의 눈에도 근정전을 비롯한 궁궐에 건물들은 웅장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이는데
그 옛날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보는 사람들의 놀라움이 짐작 되지 않는다
근정전 지붕을 저리 높게 지어 궁궐 담장 밖에서도 보이게 했던 것은 백성들에게 궁궐의 일부분이라도 보이게 하기 위한 것 이었다고 하기도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용상 아래 좌우로 있는 자그마한 책상은 임금의 일상을 늘 기록하는 사관들의 자리인 듯,
두 마리의 황룡이 여의보주를 가운데 놓고 서로 차지하려는 듯 맴돌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근정전 5방신중 사신(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는 월대 난간에 있고 오방색의 중심색인 노랑색은 중앙색이다.
그래서 노랑색은 근정전의 천장에 있다.
원래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용의 발톱은 5개인 오조룡인것을
흥선대원군이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조선을 내세운다는 의미로 7개를 그려넣었다고 ,,
흥선 대원군 할아버지, 체구도 조그마했던 양반이 배포하나는 태산만큼 이었었나,,겁이 없었어,,ㅎ
근정전의 천장
근정전 천정의 아름다운 단청 모습인데 이것을 감입천장(嵌入天障)이라고 한다는데 무슨뜻인지는 모르겠고
嵌 산깊을 감
入 들입
天 하늘천
障 막힐장
근정전 월대 를 오르는 중앙계단에 답도
철제 난간이 둘러진 이 부분은 답도라 하는데 가운데 봉황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 계단도 다른 곳과 달리 당초문양이 조각되어있다
답도란 정전의 중앙계단으로 신성스런 동물의 문양을 넣었고
철제 난간이 둘러져 있는 안쪽은 임금님의 가마 만이 지나다닐 수 있으며 임금외에 누구라도 이곳을 밟으면 삼족을 멸하는 벌이 내려졌다고,,
해가 답도에 중앙에 오면 정오인 것을 알게 방향이 잡혀 있다고 한다
중국의 황제의 경우는 답도에 용을 조각했는데 조선은 제후국이었기에 봉황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경복궁의 답도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비해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설립하고 황제 자격의 거처였던 덕수궁의 답도에는 용의 문양을 조각해놓았다. 한다
조정
정전 아래 마당에 품계석이 있는 곳을 조정이라하고
조정은 법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조회를 하는 넓은 뜰을 의미한다.
조정에는 화강암으로 된 큰 돌들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얇고 넓적한 돌을 박석이라고 부른다.
박석은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표면도 울퉁불퉁하다.
궁궐에 이런 돌을 깔았던 첫 번째 이유는 왕이 행사에 참가시 건물안에서 밝은 뜰 위에 서있는 신하들을 보게 되는데,
땅에 반듯한 돌들이 깔려 있으면 눈이 부시므로 난반사를 일으켜 빛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품계석은 정조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는 조회가 자주 열리지 않는 것이라 신하들이 자기자리를 찾아 서지 못해 품계석을 만들었다한다
조회를 열때 임금님과 바깥 신하들과 거리가 있으니 안에서 임금님이 말을 하면
월대위에서 그것을 받아 큰소리로 신하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잇었다고 한다
정 (鼎) (향로)
임금은 근정전 뒤에 있는 강녕전이나 사정전에 머물러 있다가 뒷쪽 연결된 회랑을 통해 뒷문으로 들어와 어좌에 앉으면
월대 위 앙 옆에 있는 정(鼎)에 향을 피워 월대아래 품게석 옆에 서 있던 신하들에게 임금이 착석한 것을 알렸다고
근정전 앞에 양쪽으로 있는 고정식 대형 향로는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과 대한제국의 법궁인 덕수궁에만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1942년에 촬영된 덕수궁 사진에 보면 향로 뚜껑이 있었다는데 근정전에 있는 것도 뚜껑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뚜껑은 문양을 넣어 조각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정에 향을 피우면
그 연기가 구멍을 통해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2010년에 사라진 정의 뚜껑 하나를 찾았다고 한다
故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鼎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솥 鼎)은 세개의 발을 지닌 그릇이라 하여
삼족기(三足器)라 부르기도 한다고
이 세개의 발이 명예욕과 권력과 재물욕을 뜻하는 것이고 세개의 발이 제자리에서 조화롭게 받치고 있으면 솥은 넘어지지 않지만
세개의 발중에 하나가 길어지거나 짧아지거나 하면 균형이 깨어져 솥이 쓰러진다고,
그것은 군주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놀러온 어린이
사진을 찍고 싶다하니 치마를 들고 요래 예쁜 표정을 지어 주고,,ㅎ
조회를 여는 조정을 반들거리는 돌이 아닌 박석을 거칠게 깔게된 또 한가지 이유는
대신들이 모두 가죽으로 밑창을 만든 신을 신었는데 바닥이 반들 거리면 비라도 오는 날이면 모두를 미끌어져 넘어지는 사람이 많아서
그걸 방지하느라고 박석을 울퉁 불퉁 거칠게 깔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근정전 옆 전각을 이어주는 회랑
처음 궁궐이 지어질때는 가까이 있는 전각이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지어졌었다고 ,
지금은 복원된 것이라 회랑을 다 살리지 못했다고
우리나라 목조건축에 수명이 얼마인지 알수 없으나
봉정사에는 신라시대에 창건하고 고려시대 중수하였다는 1천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있는 건물이 있는 것 보면
1867에 건축된 근정전은 이제 200년도 안되었으니 잘 보존해서 후세에 전해져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아,,,관광객이 너무 많아 훼손되거나 화재위험에 취약하거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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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인데 국보15호 극락전은,
1972년 해체보수 때 발견된 1625년 (인조3년)에 작성한 상량문에 의하면 공민왕 12년(1363)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온 건축물이니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확인되었다.한다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 등은 조선시대 건물로 이역시 국보, 보물로 지정되어있고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고건축물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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