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일기

드라마 "상도" 재방송을 보면서 최인호 작가님이 생각난다

L일순 2021. 7. 25. 16:05

최인호 투병기 ⑦ ,,,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주소서.(1)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에서 한용운은 노래하였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무엇이든 한 처음의 추억은 신새벽의 처녀성을 갖고 있습니다.

첫사랑, 첫눈, 첫날밤처럼 첫 키스의 추억이 야말로 그대와 나,

우리의 인생에서 영혼의 부싯돌끼리 부딪쳐 일어나는 날카로운 섬광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셨지만,

첫 번째 기적은 공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행하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 킨 장면입니다.

혼인 잔 치 도중에 성모님이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말씀하시자 주님은

“아직 제 때가 오지 않 았습니다.”라고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이르시자

주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시고 그것을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술맛을 본 사람이 신랑을 불러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일이요!” 하고 감탄합니다.

얼핏 보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나병환자를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극적인 기적과는 달리

첫 번째 기적 은 이처럼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아직 때가 오지 않 았음에도

어머님의 간청에 못 이겨 행하신 지극히 사소 하고 사적인 마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제게 엄청난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저번 주보에서 최고의 기도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음을 구하는 엿가락의 기도’라고 잘난 체하였지만

제가 숨겨둔 비 장의 카드는 막무가내식 떼 기도입니다.

성모님께 묵주 기도를 드릴 때면 저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창피도 없습니다.

누가 엄마에게 고상하게 매달립니까. 성모님은 주님과 달리 결혼도 하셨고,

아이를 낳으셨고, 산후 조리도 못하고 이집트로 피난까지 가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내로 고생하셨고, 열두 살 되던 해에는

무단가출한 문제 아들 때문에 사흘이나 “줄곧 찾아 헤맸는데도”(눅 2,46) 막상 찾아내어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라고 한마디 하자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는 불효막심한 대답까지 듣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되셨고, 십자가에 매달린 아드님이 입었던

“위에서 아래 까지 혼솔 없이 통으로 짠”(요한 19,23)옷까지 길쌈하며 지켜봐야 했던 비극의 여인이셨습니다.

5년에 걸친 투병생활 중에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습니다.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저는 더는 작가가 아닙니 다.

그러나 창작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극한의 정신 노동과 같은 것입니다.

항암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황폐한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습니다.

저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 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성모님께 생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엄마. 저 글 쓰게 해주세요. 앙앙앙 앙,

아드님 예수께 인호가 글 좀 쓰게 해달라고 일러주세 요.

엄마, 오마니! 때 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드님은 오마니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앵앵앵 앵,

오마니, 저를 포도주로 만들게 해주세요 .

이 세상을 잔칫날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좋은 포도주 로 만들게 해주세요.

아드님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 때 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눅 2,48) 하고 혼을 내세요.

아이고 엄마, 어 무니, 으잉 으잉잉잉잉.”

주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주소서.(1)

최인호 투병기 중에서,,,펌

 

ㅡㅡㅡ그때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펐었는지

이토록 글을 쓰고 싶었던 분이었는데ㅡㅡㅡㅡ

~~~~~~~~~~~~~~~~~~~~~~~~~~~~~~~~~~~~~~~~~~~~~~~~~~~~~~~~~~~~`~~~~

~~~~~~~~~~~~~~~~~~~~~~~~~~~~~~~~~~~~~~~~~~~~~~~~~~~~~~~~~~~~~~~~

나는 학교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지식도 짧아 고인이 되신 최인호 작가님의 품성이나 그분의 문학성을 평가 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어려서 부터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명망있는 작가의 작품이든 아니든 어디에든지 글자가 써 있으면 읽어야 하는 읽는 중독증 같은게 있어서

최인호 작가님의 글도 몇 편 읽었었다

 

나는 1944년생

(지금 보니 1644년생 이라고 되어 있었다,,그러면 내가 몇 살 인 것이여,,,에휴)

최인호작가님은 1943년생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자라서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같은 시대상황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그 분의 글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그도 친근감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고,

 

소설 "상도"는 드라마를 본 후에 읽었었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원작을 훼손 했느니 아니니 말도 많았는데

정작  최인호 작가님은  자기의 작품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재미있게 엮어 졌다고 쿨하게 이야기 하셨던게 생각난다.

 

최인호 작가님은  "샘터" 라는 조그만 잡지에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숨김없이 연재 해 주셔서

친근감 있게 그 글을 읽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 샘터 잡지에는 내가 존경하는 분이 세분이나 글을 올리고 계셨엇다

지금은 세 분 다 고인이 되셨지만,

 

법정스님, 정채봉 동화작가님, 그리고 최인호 작가님,

이 세분의 글 만으로도 작은 잡지인 샘터는 어느 큰책보다 내게는 크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책이다

지금은 세 분이 다 다른 세상으로 가셔서 좋은 글도 읽을 수 없고 아쉬움이 크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지식이 짧아 최인호님의 글을 평가는 할 수 없지만

그 분의 글은 우리가 이웃사람과 말 하듯이 그런 쉬운 문장으로 자연스런 흐름으로 글이 이어져

쉽게 이해 되고 술 술 읽어져 좋았었다

 

듣기로는 최인호 작가님은 글을 쓸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펜으로 옮겨 적는 속도가 따라 가지 못해서

그분의 원고는 늘 소문난 악필이었고

책을 하나 낼때면 그분의 원고를 교정하는 출판사 직원이 몇 명 쯤 교체되기도 하고 했다 한다

 

문단에 이름이 올려진 대 부분의 작가분들은 보통 원고를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고요한 밤에 쓴다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아낼려면 여러장의 파지도 내고 한다고 들었는데

최인호 작가님은 원고를 밤에 쓰지 않고 낮에 쓴다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손이 따라 가지 못할 정도로 생각들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 오른다 하니

문학적인 면에서는 천재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인데

하늘은 우째 그런 분을 그리 일찍 데려 가셨는지,

 

그는 1945년 생이니 나보다 한 살이 적은데  2013년 그의 나이 67세(만)에 세상을 떠나 갔으니

아깝고 아까운 나이이다

나 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은 이래 오래 사는데 그리 재주가 많은 분이 70세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갔으니,

나이 들수록 생각이 더 숙성되고 익어서 80세 까지만 사셨어도 훌륭한 문학작품을 많이 남기셨을텐데,,

 

그러고 보면 만화가로 유명하셨던 고우영 화백도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작고하실때 66세 였으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두 분이 모두 너무나 일찍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을만치 머리를 많이 쓰는 분들은 그로인해 수명이 단축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책을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데

최인호 작가님이 항암 후유증으로 손가락 발가락 피부가 다 벗겨져

손가락에 골무를 쓰고 타자를 쳤다는 마지막 책은 서점에서 구입해서 간직 하고 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분의 대한 예의로,,,

------------------------------------------------

 

출생,사망,데뷔

1945년 10월 17일, 서울
사망 :: 2013년 9월 25일 (향년 67세)

 

최인호는 194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학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63년 서울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최인호는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인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별들의 고향』을 통해서였다. 

최인호의 첫 번째 시나리오는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1974)였다. 

최인호는 하길종 감독과도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바보들의 행진>(1975), <별들의 고향(속)>(1978), <병태와 영자>(1979)등이 그것이다. 

충무로에서 이름 난 시나리오 작가로 큰 명성을 얻은 최인호는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하였다. 

1976년 발표한 <걷지 말고 뛰어라>(1976)는 최인호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인생에서 성공한 상민과 실패한 길용의 상반된 삶을 다루고 있는 영화였다. 

이후 최인호는 감독을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가로서 그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게 되는데, 

<별들의 고향>의 속편(1978)과 3편(1981)을 연이어 흥행시켰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