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외모에 현숙함 갖춰
멍하니 흔들리는 촛불을 응시하던 어린 신부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다.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피는가 했더니 이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혹시나 남편의 발걸음일까 작은 바람 소리에도 설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그런데 정작 남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제 막 시집온 꽃다운 신부에게 남편의 무심함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고 또 서러웠다. 어린 신부는 구중궁궐(九重宮闕) 속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내버려진 처량한 신세였다. 날이 밝으면 낯선 법도를 신경 쓰느라 극도의 긴장에 시달려야 했고, 어두워지면 또다시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느라 잠을 설쳤다.
그저 홀로 밤을 지새우며 남편의 무심함을 원망하다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에 눈물지을 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미 남편에게 귀속된 몸, 친정이 그립다 한들 애틋함만 더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열다섯 어린 신부의 고독감은 홀로 이겨내기 힘들 만큼 버거웠을 터다.
그녀는 조선 14대 왕 선조의 정비다. 15세 꽃다운 나이에 궁궐로 들어와 18세 선조의 비가 됐다. 지금이야 열다섯이 혼례를 치르기엔 이른 나이지만 당시 풍습으로 보면 오히려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시어머니 인순왕후가 점 찍어놓은 신붓감이었기 때문이다.
금지옥엽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박응순은 성품이 부드럽고 겸손했으며 또 검소해 항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 명종이 죽은 후 아들 선조가 3년 상을 치른 뒤 비를 맞길 원했다. 또한 정비보다 후궁을 먼저 들일 수 없도록 관여했다. 후사문제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조 역시 의인왕후와 혼례를 치를 당시 이미 노총각의 범주에 속해있었다.
8세 혈기왕성한 왕은 비공식적으로는 당연히 ‘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김씨를 향한 각별함이 의인왕후 박씨를 정비로 맞은 후에도 변함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작 다른 여자에 푹 빠진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던 셈이다. 선조의 관심은 오직 김씨만을 향해 있었다. 구중궁궐 깊은 내전에서 남몰래 삼킨 속울음은 매일 밤 깊어만 갔다.
본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곧 왕의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는 의미다.
왕비에게 주어진 무엇보다 중요한 책무가 바로 아들, 즉 원자를 낳고 양육하는 일이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점은 달리 말해 왕비의 자격까지도 박탈당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아이 못 낳아 좌절하기도
인순왕후는 그동안 의인왕후의 유순한 성품을 몹시 아껴 그녀가 아들을 낳기 전까지 선조가 후궁을 두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비의 소생이 태어나기 전 후궁을 들인다면 혹시나 후사문제에 따른 다툼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비에게서 후계자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는 소주방 나인 김씨를 선조의 후궁으로 들이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왕의 후손을 낳는 것은 궐 내 안위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후궁이 되자마자 아들을 연이어 낳았다. 바로 임해군과 광해군이다. 김씨는 아들을 낳은 즉시 ‘공빈’ 호칭을 받고 신분이 상승했다. 김씨의 득남으로 인해 의인왕후가 느꼈던 박탈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터다.
아무리 힘들고 서러워도 모든 것을 홀로 감내했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낄 법한 원망조차 없었다.
훗날 자식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후궁들의 불꽃튀는 경쟁을 뚫고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도 정비 의인왕후의 힘이 컸다. 그녀는 평생 다른 여자의 그늘에 가려 남편의 사람을 받지 못했지만 이를 원망하기보다 그들의 자식을 정성으로 품어내며 내전의 평화를 지켰던 것이다.
유교적으로 왕비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에도 그녀를 향한 실록의 평가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비범한 성품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의인왕후는 남다른 포용력과 이해심으로 내전 여성들을 두루 감싸 안아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까지 칭해졌다.
나를 섬김에도 공경을 다하여 한결같이 어김이 없었다. 외가의 사삿일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으며 후궁들을 대함에도 은애가 지극하여 그들 보기를 수족같이 했다. 또한 여러 아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 소생과 같이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기에, 내가 간혹 그 소행을 시험하여 여러 아이들을 장난삼아 질책하면 하나같이 대행의 뒤로 도망가 숨었으며 대행은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었다. ”
궁인과 여종에게도 노기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은 일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종종 권할지라도 하지 않으니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인 바, 저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이 아니다. 이러한 덕행으로도 자식을 두지 못했고 장수하지 못했으니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의인왕후의 이 같은 성품은 본래 지닌 천성일 가능성이 짙다. 그 러나 절망에 맞닥뜨린 순간 의지했던 귀의처가 바로 불교였음을 감안하면, 그녀가 궁궐에서 ‘관음보살’로 일컬어진 것도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듯하다.
“전국 곳곳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 조선 중기 유학자들의 탄식이 이를 방증한다. 건봉사와 법주사 등에서도 의인왕후의 불사 기록이 다수 전해진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정비로서 안위를 보존할 목적보다 한층 높은 차원의 순수한 모정이었을 것이다. 인자하고 자애로웠던 의인왕후였기에 임해군과 광해군을 비롯한 많은 원자들이 그녀를 친밀히 따르며 이미 안위에 대한 불안은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다섯 어린 신부가 짊어졌던 고독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굳건한 의지처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각별히 아꼈던 시어머니 인순왕후도 남다른 불심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두 사람이 함께 신행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조에게 홀대 받는 불쌍한 삶을 살았을까. 혹시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을 넘어선 깊은 신뢰가 있지는 않았을까.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성품을 칭송하는 선조의 글, 그리고 “중전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으니 실로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며 깊은 슬픔에 탄식했다는 기록이 그 가능성을 시사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시 왕실의 피난길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선조는 총애하던 후궁 인빈 김씨와 피난을 떠났고 의인왕후는 홀로, 또는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인왕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주에 머물다 ‘내전의 환궁’을 촉구하는 상소가 있은 후에야 궁으로 돌아온다. 오랜 피난생활로 얻은 병환이 45세 단명의 직접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인왕후와 동행했던 광해군이 세자 후보였다는 점은 그녀를 향한 선조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당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후대에서 논하는 자체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인왕후의 성품, 그리고 남다른 불심은 그녀를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로 한정시키기엔 안타까운 측면이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아픔을 딛고 치우침 없는 사랑을 베풀며 왕실의 평화를 이끌었던 의인왕후. 어쩌면 그녀야말로 진정 ‘살아있는 관음보살’ 또는 ‘인욕보살’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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