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향기

건봉사 2, 잡초우거진 빈터에 이끼낀 돌축대만,,그리고 ,능파교, 사명당의승병기념관

L일순 2014. 11. 27. 11:16

 

보물 제 1336호인 건봉사 능파교

高城 乾鳳寺 凌波橋

 

조선시대의 돌다리. 능파교(凌坡橋)는 ‘능히 파도를 헤치며 극락세상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있다.

고성 건봉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건봉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을 연결한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얄려주는 비석이 있어 

홍예교(무지개모양의 다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홍예교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 되게 만든 다리

 

건봉사 적멸보궁, 불이문, 대웅전, 만일염불원, 범종각 보기 : http://blog.daum.net/tkfkd1919/5977213

 

 

 

 

다리를 위에서만 촬영하고 보니 보물로 지정된 역사깊은 다리라고 되어 있어

다리 아래에서 제대로 잘 찍어볼려고 개울에 놓여 있는 돌을 밟고 들어섰다가  시간이 촉박해 급한 마음에 발을 잘못짚어 물에 빠지고

엎어질뻔 하였다

요즘 다리놓는 방식처럼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맞물리게 하여 무지개 모양으로 멋을내느라 가운데 부분이 약해 보여도

오랜 세월 버텨온 것을 보면 옛사람들의 장인정신이 다시 돋보이게 한다

 

 

 

 

 

 

 

 

 건봉사 들어서면 바로 있는 기념관,, 바쁜 일정으로 안으로 들어가보진 못하고

건봉사 가기 조금전에 사명대사 동상도 있는데 우리를 안내해준 분이 차를 세워주지 않아서

사진에 담지 못했다,,그곳 근처에 부도탑도 있었는데,,

 

사명대사 왜적맞서 救國선봉에 선 민족주의자

임진왜란때 도술을 부리며 왜적을 굴복시킨 일화를 통해 신통력이 대단한 초인간적인 존재로 묘사된 사명당.

때문에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하기 쉬우나 그는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고 진리를 실천한 수행자이며 종교인이었다.

민족이 국난을 당했을 때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전쟁을 치른 민족주의자였으며

백성들을 전쟁과 기아, 살육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인간주의자였다.

 

일본을 왕래하며 포로 교환 및 전후 배상문제 등을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또 당대 학자들과 교류한 대문장가로 그의 족적은 강원도와 연관이 깊다.

사명대사 유정 四溟大師 惟政(1544-1610)의 속성은 豊川 任씨,

본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시호는 慈通弘濟尊者. 법명은 惟政이다.

 

1544년(중종 39년) 10월 17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남. 본명은 임응규.

 1548년 5살의 나이에 장악원정, 대구도호부사였던 할아버지 임종원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1556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후인 이 해에 유촌 황여헌(이조참의, 홍문관 대제학, 금산과 울산의 군수를 지냄.)으로부터 글을 배운다.

소년 백일장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다'라는 시로 장원을 한다.

 

 1557년 초시 과거에 급제. 

 1558년 어머니 달성 서씨, 세상을 뜸. 

 1559년 아버지 임수성 세상을 뜸.

 

 1560년 경북 김천 황악산 직지사로 들어가 중이 되어 신묵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1561년 스님들의 과거시험이었던 선과에 장원급제.

 

 1562년 유촌 황여헌의 딸이 절로 찾아와 그 일로 사명대사는 절에서 쫓겨난다.

그 후, 영취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는다. 당시, 명종의 어머니 문정 대왕대비의 신임을 얻고 있던 보우대사의 재판으로 무죄가 되었다.

 

 1563년 봉은사(지금의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에 있는 절)에서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불교를 이해시킨다. 

 1564년 직지사로 돌아와 경전을 읽고 참선에 몰두한다. 

 1572년 스승 신묵화상 입적(죽음). 직지사의 주지가 된 후, 대선사가 되고 선종(불교의 종파) 판사로 추대되었다.  

 1575년 묘향산 보현사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선법술을 전수받는다.

 

 1577년 기어당 영규, 뇌묵당 처영과 함께 서산대사로부터 칼쓰기, 활쏘기를 배운다. 

 1578년 산에서 나와 황해도 해주에서 율곡 이이에게 국난(임진왜란)을 예고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한다.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도를 닦는다. 

 1581년 유점사에서 나와 전국을 떠돈다. 오대산 월정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도를 닦는다. 

 1589년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12월에 정여립 역모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어려움을 겪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종 부총섭이 되어 (전국 8도의 불교 16종파를 지휘할 수 있는 도총섭을 돕는 자리.

도총섭은 서산대사였다.) 승의군(스님들로 이루어진 군대)을 일으켜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을 돕는다.

 

 1593년 명나라 이여송의 원군과 합류하여 평양성을 되찾는다. 

 1594년 서산대사가  묘향산으로 돌아가자 도총섭이 되어 승의군을 지휘한다.

 

울산의 일본 장수(가또 기요마사)의 진을 3번에 걸쳐 방문해 담판을 하는 동시에 적을 탐지했다. 

 1597년 정유재란(일본이 다시 쳐들어옴.)이 일어나자 울산에서, 순천에서(1598) 공을 세움. 

 

 1602년 동지중추부사에 오름. 

 1604년 통신사(일본과의 평화를 위해 보내졌다.)가 되어 사절단 120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간다. 

 1605년 임무를 다 하고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온다.

 

 1607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3일만에 그만 두고,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감. 

 1610년 참회 수도생활을 하던 중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 국상(나라의 기둥같은 사람에게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장례)으로 장례를 치름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이곳 건봉사에서 양성했던 의승병의 숫자가 6000명이 넘었고
그들이 먹을 밥을 짓는 쌀을 씻은 물이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하니
지금보다 인구가 적었던 조선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그 규모가 대단 했던 것이다
 

 

 

 

그는 스님으로서 또 승병장으로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왜인들과 맞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인물이다.

사명당이 왜인들과의 전쟁에서 또 외교담판에서 보인 대담함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명과 왜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면서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시점에 조정에서는 왜의 의도가 무엇이고 그들의 정세가  어떠한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활동의 적임자로 지목된 사명당은 여러 차례 우리 군영의 
사절로서 교섭을 위해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를 방문하였다.

사명당은 명과 왜가 조선분할을 목적으로 강화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과 이와 관련해 왜군 내부에 분열이 있음을 탐지하였다.

그는 상경하는 즉시 선조 임금께 왜의 진정한 목적이 강화에 있지 않다는 것과

그들의 분열을 이용해 적군 와해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그가 보고한 적군 동향에 대한 정보들은 우리 군의 전략을 
 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544년(중종 39년) 10월 17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610년 광해군 2년 8월 26일 나이 67세 법랍은 57세로 입적 하였다

 

한국 불교역사를 통해 명멸했던 많은 구도자들중에 사명대사만큼 큰 업적을 남긴 분도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는 구국의 용장으로, 또한 뛰어난 전략가이며 외교가로 활약 했었지만
언제나 겸허한 구도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었다한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를 비롯한 모든 학문을 섭렵한 스님은 당시에 이른바 지식계층에서도 크게 명성을 떨쳤던 분이다

 

내가 어렸을때 읽었던 어느책에서,, (그게 교과서 였는지 아닌지 자세한 기억이 없지만)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건너가 왜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대접에 바늘몇개를 넣고 휘휘 저으니 국수가 그릇에 그득해지고 그걸 맛있게 자셨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분의 자취를 찾다보니 존경할만하고 대단한  분이시고 요즘같이 혼란한 시대에 다시 태어나셔서

세상을 바로 이끌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처럼 임진왜란 발발 초 건봉사에서 활약한 사명당은 13년 뒤인 1605년 건봉사를 다시 찾아

석가모니 치아사리를 봉안하는 두번째 연관을 갖는다.

임진왜란후 왜구가 탈취해간 통도사의 불치아 사리를 되찾아와 여러 절에 나눠 봉안하는 '분장'을 택했는데, 그 중 한 곳이 건봉사.

때문에 건봉사에는 사명당과 관련된 유물과 유품이 많이 소장돼왔다.

사명대사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제은입사향완(靑銅製銀入絲香琓)과 건봉사 낙서암에 보관된 사명대사의 원불(願佛)은

1945년 광복 이전까지 고스란히 보존돼 왔으나 광복이후 모두 도난당했다.

 이밖에 사명대사의 화상과 원불은탑과 쇠지팡이, 신발, 산호염주 각 1점와 금란가사 한벌 등의 유품이 있었으나

역시 6·25 전쟁때 절이 완전히 불에 타는 바람에 소실됐다.

건봉사에서는 1799년(조선 정조23년) 사명대사 기적비와 사명수충각, 사명비각을 창건했으며

1828년 사명영각을 건립하고 단청을 하는 등 그의 높은 뜻을 기려왔다.

 

현존하는 유물로 강원도관찰사 南公轍의 발기로 세워진 '사명대사 기적비'가 있으나

일제치하인 1943년 풍신수길을 설득시켰다는 내용이 쓰여진 44자의 글자를 고의적으로 삭제한 채 일본 경찰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됐다.

 산산히 조각난 채 땅 속에 묻혀있던 이 기적비는 1986, 87년 고성문화원 회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유적지로는 의승군 훈련장및 의승군들이 함께 마셨다는 '장군샘' '장군수'로 불리는 샘터가 전해오고 있다.

고성군은 사명대사 선양사업과 함께 건봉사 석가모니 치아사리를 조명해 역사적 의의를 밝혀 문화재로 지정하고

 관광자원으로 홍보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고성문화원은 건봉사지 국역 및 사명대사 기적비 복원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명당기념사업회(이사장 朴權熙)는 사명당의 주요 유적지로 고성 건봉사를 꼽고,

북강원도의 표훈사, 유점사 등과 연계한 통일교류 사업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선양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강원도민일보 자료.

 

사명대사의 승군과 샘물
사명대사가 건봉사를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건봉사가 임진왜란 당시 7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쓸 수 있는 물과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니 건봉사의 규모가 어느정도 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많은 수의 승군들이 군사훈련을 하면서 마셨다는 샘터가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바위틈에서 나오는 암반수이며 약수라고 전해진다,

훈련에 지친 승군들은 이 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었으며, 상처입은 부위를 이 샘물로 씻어내면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하고,

 치료약을 다릴 때 이 샘터의 물로 약을 다리면 빨리 나았다고도 전해진다.
건봉사 주위에 사는 분들은 이 샘터의 물은 비가와도 늘지않고 가뭄에도 줄지않으며, 한달이상 두어도 물맛이 한결같다고 한다.

건봉사 대웅전 지역 동쪽 끝에 위치한 샘터에 가면 400여년의 시간을 이어 사명대사의 고매한 호국정신을 이야기하듯

맑고 차가운 물이 변함없이 흘러 나오고 있다한다

 

 

 

 

 

 

 

 

 

 

 

[만해당 대선사 시비]:금강산 건봉사

 

사랑하는까닭(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은 까닭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 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것은 까닭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것은 까닭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석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2단으로 쌓고 위에 쌓은 것을 좀 안으로 들여 쌓은 기법이 돋보인다

 

 

 

 

 

 

 

일정이 바빠서 시간은 없고 사진은 많이 찍어야 하고

이런 안내표지에 있는 글을 읽을 시간이 없어 사진으로 찍어와 집에서 읽어 보는데  이런 것도 있었다

이 소나무를 사진에 담아오지 못해 아쉬웠는데 사진 정리를 하면서 보니

래도 다른 사진 뒸쪽에서나마 소나무모습이 담겨서  안도와 환호,,,

제대로 잘 담아오진 못했지만 두 장이나 찍혔네~~

 

 

 

 

돌 축대만 남은 빈터가 아쉬워 사진에 담았는데 한쪽 옆으로 소나무도 들어와 있다~~

 

 

불이문 들어서서 바로 보이는 이 돌도 어느전각 기둥을 세웠던 주츳돌 이었을까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반들하게 다듬어지지도 않은 거친 돌들로 쌓아 올린 축대가

순박한 옛시절 사람들을 대하는 양  정이 느껴진다,,

 

 

 

 

 

비틸진 지형을 다 깍아내리지 않고 축대를 쌓아가며 전각을 세웠던 것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요즘 사찰들은 보여주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찾는이가 많은 사찰엔 몇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각을 낡은 헌옷을 벗어 던지듯이 주저없이 헐어버리고 번듯하게 새 전각을 짓고

누구키가 더 큰가 내기 하듯이 하늘을 찌르는 커다란 불상을 앞다투어 세운다

 

그런 곳에 가면 사찰이 마치 상품을 진열해  놓고 팔고 사는 곳 같아서 엄숙함도 경건함도 예배할 마음도 없어지는데

잡초우거진 곳에  이끼낀 돌축대만 보이는 이곳을 둘러보노라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 지고

어느곳에서 풍경소리 들리는 듯 해서 쉬이 발길이 돌아서 지지 않았다,,

이 곳에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을 해 번듯한 전각을 세운다 하나  난 이 빈터가 더 마음의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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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이의 발길이 분주했을 돌층계엔 무심한 담쟁이 덩굴만 얼크러져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