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향기

고성 건봉사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펌

L일순 2014. 11. 24. 14:10

 

건봉사1 적멸보궁 ,대웅전,봉서루, 만일염불원, 불이문   : http://blog.daum.net/tkfkd1919/5977213

 

건봉사 2 능파교 사명당의승병기년관 만해 한용운 시비 출정사 소나무 : http://blog.daum.net/tkfkd1919/5977214

 

 

건봉사 부처님 치아 진신사리 도굴사건

 

지금은 해제되었지만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민통선내, 고성에 건봉사(乾鳳寺)라는 사찰이 있다.

위치적인 이유로 인해 일반인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건봉사는 신라시대 사명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자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고 있는 대사찰 중의 하나로서 이 곳에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1986년 이 진신치아사리가 도굴·절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불교조계종에는 총무원의 전 재산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는 전국의 사찰 3천여개소를 뚜루룩 꿰고 있으며,

어느 절에 어떤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지, 어느 사찰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는지도 훤히 알고 알고 있다.

그런 그의 꿈에 어느날 밤 부처님이 현신(現身)하셔서 도굴당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 이상하여 다음날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를 찾아간 그는

사리탑이 훼손되어 돌뚜껑과 사리함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급하게 부재들을 수습하여 상경한 그는 다음날로 문화재 사범단속반에 신고하였다. 이 때가 1986년 ,,초여름

이 사건은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알려준 것으로 시작하여 도난된 사리를 찾는 과정도 드라마틱한데 다음과 같다.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신고를 받고서 문화재 매매가 주로 이루어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및 장안평 등지에서

그 분야의 고참들에게 소문도 흘리고, 알고 있지 않느냐고 은근한 협박도 하면서 관련자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문화재 사범단속반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50대로 여겨지는 남자목소리였는데, 내용인 즉

고성 건봉사에서 도굴·절취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사거리,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야파크호텔’에 있고,

그 호텔 프런트에 가서 ‘강원도 신흥사 해법스님이 맡겨둔 약을 달라’고 하면 물건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만을 마치고 전화는 끊겼지만 당시 전화라는 것이 녹음이 되기는커녕 발신자 전화번호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난전화로 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즉시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되돌려서 ,,사리를 도굴했던 당시 상황과 그걸 도로 내 놓게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서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한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지만, 관리 또한 어렵다는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 유유자적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는 척 했다.

일당은 12일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다.

하지만 잘못 가져간 것이다.

 6월 하순부터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것이다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한달여에 걸친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봉천동의 가야파크호텔로 가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종업원이 호치키스로 꼼꼼하게 찍어서 삼중으로 포장한 누런 꾸러미 하나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받는 즉시 손에 땀이 배었다.

 하지만 부처님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귀중한 신앙의 대상인 사리를 마음이 급하다고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선 대한불교조계종 기획관리부장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객실로 들어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모셔 놓고 기다렸다.

 

약 1시간쯤 지나서 총무원에서 스님 3분이 도착하여 함께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불교의식에 따라 엄숙한 절을 올린 뒤, 삼중으로 포장된 누런 꾸러미를 열었다.

사리함이었는데 외함은 청동으로, 내함은 은제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은제함을 여니 그 안에 또 금제함이 들어있었다.

후령통(候鈴筒)을 싸고 있는 명주천을 풀자 수정후령통 안에 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조계종총무원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에 따르면 건봉사의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는 모두 12과라 한다.

신라 자장율사가 가져와 경남 양산 통도사에 모셨던 것을 임진왜란 때 일본 놈들이 약탈해갔고,

 선조 38년(1605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서 동 사리를 환수받은 후,

당시 제일 큰 사찰인 강원 고성 건봉사가 안전하다 하여 석가모니사리탑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텔방에서 열어 본 사리함 안에는 8과만이 들어 있었다.

그 때가 오후 3시경이었는데, 사리를 보고 있노라니 그 빛깔이 은색으로 변하면서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리가 나머지 4과를 찾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어서 그랬을까.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사리를 모시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은 종로구 광화문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문화관광부 건물 8층에 있었으며,

일단 도굴·절취된 석가모니 사리함과 진신치아사리 8과에 대해 회수 보고한 뒤,

미회수된 사리 4과를 찾기 위해 달아난 범인을 추적할 차례였다.

동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민간인이 출입 금지된 민통선지역이니만큼 분명 출입자명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즉시 신흥사스님께 전화해서 비밀리에 검문소에서 출입자 명단을 확보해 달라고 부탁하여

 다음날 출입자 명단을 입수, 살펴본 결과 강릉에 있는 문화재매매업자 류○○를 포함한 문화재 전문도굴범 3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서울지검 문화재 담당검사에게 동향보고 후 주변 관련자 대상으로 탐문수사 하고 있던 중,

어찌된 영문인지 민간인이 출입 못하는 민통선 안에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도굴·절취 되었다고 언론에 크게 공개되고 말았다.

즉시 관련자 신병 확보를 위해 검사지휘를 받아 수사에 착수, 먼저 관할 지역 군 사단을 찾아갔다.

조계종 사람들과 사범단속반 소속 수사관 2명이 동행했다.

용의자는 고, 류, 황, 이를 포함한 4명으로 모두 이 바닥에서는 한 솜씨 하는, 면식이 있는 이들이었고

그 중 류씨는 강릉에서 골동품매매업을 하는 친구였다.

먼저 류씨를 검거하기 위해 강릉으로 향했는데 주소지에 찾아가 보니 어찌된 영문인가 가게가 없어진지 한참 됐다는 것이었다.

 혹시 이미 도주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주변을 수소문한 결과 시내 대형마트 2층으로 가게를 옮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를 건너편에 세워두고 가게로 올라가 보니 류씨는 없고 부인만 있었다.

 부인한테 류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로 남편을 찾는지 꼼꼼히 묻는 것이 아닌가.

 이미 늦었구나 하면서도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서울서 보러왔다”고 하였더니

 “잠깐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곧 올테니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는데 범인은 아직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고 도망을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혹시나 해서 류씨의 집을 들러봤더니 단칸방에 초등학생 등 어린 4명의 남매가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고 사는 것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상황에 가장을 잡아 구속시키면 어떻게 살아갈는지...

 인간적인 고민을 하면서 돌아와 20분쯤 기다리자 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간만이라고 하면서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을 때, 길 건너 가게 앞으로 보안대 지프차 2대가 들이닥치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차에 류씨를 태우고 출발했으니 보안대는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고 바닥을 쳤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오던 중 류씨가 집에서 걱정할 테니 전화하게 해달라고 해서 연결해 주고 돌아앉아 있었더니

 급한 일이 생겨서 서울에 있다고 둘러대는 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날 18:00경 서울 중구 소재 덕수궁 사범단속반에 도착해서 밤샘 조사를 한 끝에

석가모니 사리탑을 도굴·절취한 일당이 확인되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동 사건이 매우 중요하고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서울지검 특수3부와의 공조수사를 지시했다.

관련자를 검거하기 위해 서울지검 특수3부장의 지휘 아래 5개 팀이 편성돼, 새벽 4시에 일제히 출발했다.

수사대가 나누어 탄 검은 세단들이 새벽녘의 조용한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진다.

대구, 대전, 천안, 청주, 장안평으로 출동해 4명의 범인을 검거하였고 중형인 류씨 등은 법원에서 10년형을 받았다.

범인 중 이씨와 류씨는 매제간이었으니 집안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싶기도 했고,

 이 사건의 경과와 관련하여 유능한 장교 2명이 옷을 벗게 된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나머지 사리 4과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범인들에 의하면 원래 8과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범인을 잡는 한 편에서는 돌아온 석가모니 진신사리의 제자리찾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은 진신사리를 꽃가마에 모시고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실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옮겨서 조계사 법당에 모셨다.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하려는 불교인의 행렬이 종각까지 길게 늘어섰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일로 인하여 불교문화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불교문화의 역사가 오랜 나라이고, 당시 도난되는 문화재는 그 70%가 탱화, 목각동자상, 부도 같은 사찰문화재였다.

그 후에도 도난당한 사찰문화재를 회수하여 원 사찰에 돌려준 것이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90년 여름에 선배 등 세 가족이 함께 대관령 골짜기에 피서를 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찾아와서 강릉 류씨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힘들고 긴 5년이란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얼마 전에 모범수로 출감, 지금은 강릉 경포대 강문 솔밭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지 걱정도 되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찾아가려 하니

 같이 있던 친구가 보복을 당하면 어쩌려고 하냐면서 강하게 말렸다.

그러나 나는 문화재 사범단속이라는 업무를 하면서 일말의 거짓 없이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해왔다.

보복의 두려움보다는 사람의 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경포대 내 솔밭으로 류씨 가족을 찾아갔는데,

 마당에서 닭 모이를 주려고 배추를 자르고 있는 류씨를 보는 순간 반가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눈가에 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서 류사장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화를 내야 할 류씨는 나를 보자 뛰어와서 나를 부둥켜 안으면서 반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식당으로 달려가 부인에게 문화재관리국 강부장이 왔다고 하자

부인 역시 뛰어나와 둘이서 나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끌고 들어가서 푸짐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류씨는 그 사건 후 문화재절취나 도굴에서 손을 씻고 강릉 경포대 내 솔밭에서

오골계와 닭을 키우며 아내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어울려서 살아간다.

그 가운데에서 참 모습을 발견하고 또 감동을 받으면서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안전과 / 강신태 2007.7.6>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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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사진 : http://blog.daum.net/tkfkd1919/5977213

첨가글

조계종은 되찾은 치아사리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헌금이 산처럼 쌓였다

이 자금으로 불교방송을 세웠다

조계종은 사리를 돌려주지 않았다, 길고 긴 소송끝에 사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위복인가..치아사리 도굴사건으로 잊혀진 건봉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1988년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일반인의 출입도 자유로와졌다 지금 건봉사는 중창불사가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