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낙산사 홈에서 펌
낙산사 사진,,1,,http://blog.daum.net/tkfkd1919/5977198
낙산사 사진,,2,,http://blog.daum.net/tkfkd1919/5977199
낙산사는 2005년 4월5일 식목일 양양 지역에서 난 산불이 옮겨붙어 주요 건물들이 전소됐다.
의상조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관음성지 낙산사의 소실에 불자를 비롯해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 주지로 부임한 지 보름 만에 그런 재앙을 맞았다.
낙산사 복원을 위해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그는 거둬들이려 하기보다는 퍼주는 불사를 전개했다.
화재 이후 복원 불사 도중 낙산사 입장료를 없애고, 점심때는 낙산사를 찾은 관람객들에게 국수를 공짜로 대접했다.
자판기 커피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너무 많은 인파가 국수를 먹어 절 재정에 부담이 된다면서 유료화하려는 소임자에게
“수십만명이 기뻐할 일을 그만둬야겠는가. 그 기쁨을 없애려는 네가 절을 나가야겠는가”라고 호통을 친 일화가 있다.
또 소임자들이 국수실 앞에 둔 보시함을 보자 “줄 때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어 편하게 먹게 하라”며 보시함을 도끼로 부수기도 했다.
지금도 낙산사 무료 국수실엔 인파가 몰려 연간 10만여명이 무료로 국수를 먹고 있다.
이로 인해 낙산사를 다녀간 이들이 복원에 동참하면서 복원 불사에 국민적 참여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에 따라 낙산사의 원통보전, 빈일루, 설선당, 심검당, 선열당, 취숙헌, 정취전, 송월요, 범종, 동종, 지장전, 정취전,
응향각, 대성문, 홍예문, 의상대 등이 복원되고 주변 환경이 정비돼 오늘날 동해 최고의 가람으로 재탄생했다.
복원 불사와 동시에 낙산요양원, 낙산노인복지센터, 낙산유치원, 무산지역아동센터,
의상도서관을 지어 낙산사가 입은 은혜를 지역민한테 돌리는 자비불사를 펼치면서 양양 일대의 복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가 화마를 입은 지 3000일 즈음인 오는 24일 3000일 회향식을 하고 낙산사 회주직에서 물러난다.
낙산사는 전 불교방송 이사장 도후 스님이 주지를 맡는다.
한겨레신문 2013년 11월 12일 조현 기자 ,,,펌
창건설화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고 전해 진다
낙산사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如意珠)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의 자리이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관음상은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하고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 낙산사 연혁
671년(신라 문무왕11) :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함.
786년(원성왕2) : 화재로 인하여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858년(헌안왕2) : 범일스님이 중창함. 이 때 세 칸의 불전과 정취보살상을 짓고 봉안함.
10세기 중엽 : 범일스님의 중창 이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들불이 일어나 이 곳까지 번져오므로써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그러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함.
1197년(고려 명종27) : 유자량(庾資諒)이 관음굴에서 기도하다가 파랑새〔靑鳥〕의 영험을 겸험함.
13세기 초 : 이규보(李奎報)가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 유물을 다시 봉안함.
1254년(고종41) : 몽고군의 침입으로 관음상과 정취보살상,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김.
양주성마저 함락되자 두 보주를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감창고(監倉庫)에 간직함.
1258년(고종45) : 감창고에 있던 두 보주를 어부(御府)로 옮겨 보관함.
1399년(조선 정종1) : 태조 이성계가 행차하여 능엄법회를 개최함.
1403년(태종3) : 태종이 선공소감(繕工少監) 김계란(金桂欄)을 보내어 재이(災異)를 없애기 위한 도량을 개최함.
1404년(태종4) : 왕실에서 내신을 보내어 기청법회(祈晴法會)를 개최함.
1466년(세조12) : 세조대왕이 행차함.
1467년(세조13) : 세종대왕이 행차하여 헌향하고 사찰 중건을 지시함.
1468년(세조14) : 학열(學悅)스님이 중창함.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칠층석탑, 홍예문, 원통보전 담장 등은 이 무렵 조성된 것임.
1471년(성종2) : 선학(仙學)스님이 중수함. 이때 용선전, 영산전, 어제루, 승당 등을 보수하고 단청도 새로 입혔다고 함.
1489년(성종20) : 산불로 인하여 관음전이 불에 탐.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의 당우가 불에 탐.
1619년(광해군11) : 관음굴을 중건함.
1631년(인조9) : 화재가 발행하여 사찰이 불에 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 등 36인이 중창함.
1643년(인조21) : 도원(道源), 대주(大珠)스님 등 25인이 중수함.
1683년(숙종9) :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 공중에서 한 개의 명주(明珠)가 내려 왔다고 함. 석겸(釋謙)스님이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탑을 조성함.
1692년(숙종18) :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을 조성함.
1694년(숙종20) : 공중사리비(空中舍利碑)를 건립함.
1697년(숙종23) : 정수(精粹)스님이 인월암(印月庵)을 창건함.
1737년(영조13) : 석겸스님 등이 사적판(寺蹟板)을 새김.
1752년(영조28) : 덕린(德麟)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1777년(정조1) : 화재로 인하여 원통보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에 탐.
1797년(정조21) : 혜민(慧旻)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1854년(철종5) : 경봉(鏡峰)·염진(念眞)·긍념(肯念)등의 스님이 화주가 되어 원통보전과 용선전을 중수함.
어실각(御室閣)을 중수함. 화봉(華峰)스님이「낙산사원통보전어실각수보기(洛山寺圓通寶殿御室閣修補記)」를 지음.
1866년(고종3) : 큰 비로 인하여 홍련암이 무너짐.
1869년(고종6) : 의연(義演)스님이 홍령암을 중건함.
1870년(고종7) : 최병복(崔秉復)이 「홍련암중건기」를 지음.
1888년(고종25) : 선학(仙鶴)스님이 빈일루(賓日樓)를 중건함.
1893년(고종30) : 선학, 인파(仁坡)등의 스님이 영산전을 중수함. 일봉(日峰)스님이 「오봉산낙산사영산전중수불사단호기」를 지음.
1895년(고종32) : 승당이 불에 타자 선학스님이 중건함.
1905년 : 경은(敬隱)스님이 선당, 후각(後閣)등의 일부 당우를 새로 지음.
1908년 : 관음굴이 무너짐.
1911년 :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관음굴을 중건함. 보룡스님이 「낙산사관음굴상량문」과 「낙산사관음굴중창기」를 지음.
1912년 : 일제의 30본말사법에 의해 건봉사의 말사가 됨.
해성(海星)스님이 빈일루를 중건함.
김동규(金東圭)가「낙산사빈일루중수기(洛山寺賓日樓重修記)」를 지음.
1913년 : 백월(白月)스님이 「영세불망기」를 지음.
1918년 : 주지 응호(應湖)스님이 법전과 요사를 수리함.
1924년 : 주지 규현(奎鉉)스님이 도량 전체를 수리함.
1925년 : 만옹(晩翁)스님이 의상대에 정자를 새로 지음.
만해(萬海)스님이 「의상대기(義湘臺記)」를 지음.
1928년 : 만해스님이 건봉사(乾鳳寺)의 본말사 사적을 편찬하면서 낙산사의 사적도 함께 정리함.
1930년 :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불에 탐.
1932년 : 주지 만옹스님이 중검함.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중건상량문」을 지음.
1937년 : 1936년의 폭풍우로 무너졌던 의상대 정자를 새로 지음.
1939년 :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의상대육각정중건기」를 지음.
1950년 : 한국전쟁 때 사찰 내 전체 당우가 불에 탐.
1953년 : 이형근 장군이 원통보전과 종각등을 새로지으면서 중창함. 7층석탑도 이 때 중수하였슴.
1959년 : 원통보전 내부의 신중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함.
1963년 : 홍예문 위의 누각을 새로 지음.
1968년 : 「낙산사동종」이 보물 제479호, 「낙산사칠층석탑」이 보물 제499호로 각각 지정됨.
1971년 : 「낙산홍예문」·「낙산사담장」·「낙산사」등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34·35호로 각각 지정됨.
1972년 : 원철(圓徹)스님이 중창을 시작함.
1974년 : 「의상대」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됨.
1975년 : 의상대를 중건함. 홍련암을 중창하면서 내부에 탱화와 제석천룡탱화를 함께 조성함.
1976년 : 홍예문을 중건함.
1977년 : 원철주지스님이 해수관음전을 짓고 동양최대해수관세음보살을 봉안함.
1982년 : 「양양낙산사사리탑」이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75호로 지정됨.
1983년 : 진철주지스님께서 고향실.무설전.무이당을 해체 복원 중창함.
1984년 : 진철주지스님게서 양양시내에 포교당 및 유치원을 개원함.
1984년 : 「낙산사홍련암」이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36호로 지정됨.
1988년 : 혜승주지스님이 범종각을 짓고 범종을 주조함.
1988년06월22일 : 전통사찰로 등록.
1991년 : 보산주지스님 일주문 건립.
1993년 : 오현, 지흥, 마근 스님의 원력으로 보타전, 보타루, 해우당을 건립하고 1500불 32응신 7관음상을 봉안함.
1995년 : 마근주지스님께서 의상대를 해체 복원함.
1996년 : 마근주지스님게서 심검당을 신축함.
1999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창고를 철거하고 근행당을 건립.
1999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홍련암을 해체 복원함.
2000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의상기념관 다래헌을 건립.
2001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의상교육관을 건립하고 원통보전 기와 번와와 단청을 함.
2003년 03월 : 설웅주지스님께서 낙산유스호텔을 인수 증.개축함.
2003년 02월03월 :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 관세음보살좌상이 보물 제 1362호로 지정.
2006.03.21 11:24 신고
'여행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산사,,2 (0) | 2014.11.12 |
---|---|
낙산사~1 (0) | 2014.11.10 |
설악산 육담폭포 구름다리 ,,30년 만에 개방이라고,, (0) | 2014.10.28 |
비를 맞으며 걸었던 설악산 주전골,,추억이 될려나,, (0) | 2014.10.20 |
아산 외암마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건재고택,, 참판댁 (0) | 2014.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