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낙산사~1

L일순 2014. 11. 10. 14:00

 

관동팔경은 강원도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낙산사 창건설화, 연혁http://blog.daum.net/tkfkd1919/5977200

낙산사 사진,,2,,http://blog.daum.net/tkfkd1919/5977199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동해안 양양 오봉산 낙산사,

남해안 남해 금산 보리암,

서해안 강화 석모도 보문사)의 하나인 낙산사洛山寺.

낙산사는 강원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오봉산에 있는 신라 화엄종 창시자인 의상대사(625~702)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신라 문무왕 때인 671년에 창건했다는  천년고찰이다.

 

2009년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으며 홍련암의상대해수관세음보살상(해수관음상)이 유명하다.

 동해안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창건이래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로 사찰의 파괴와 중건이 계속되었는데,

 특히 2005년 양양지방의 대형 산불로 보물인 낙산사 동종을 비롯하여 원통보전 등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그 후 복원불사를 겸해 발굴조사가 동시에 행해지면서 창건 당시의 원형을 많이 복원함으로써 지금에 이르렀다.  

 

복원시점은 조선 정조시대를 잡았으며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였다.

 

671년(신라 문무왕11)  :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함.  

 

낙산사 화재 일지

 786년(원성왕2)  : 화재로 인하여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10세기 중엽 : 범일스님의 중창 이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들불이 일어나 이 곳까지 번져오므로써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그러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함.    
 1489년(성종20) : 산불로 인하여 관음전이 불에 탐.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의 당우가 불에 탐. 
  1631년(인조9) : 화재가 발행하여 사찰이 불에 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 등 36인이 중창함.  
  
  1777년(정조1) : 화재로 인하여 원통보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에 탐.   
  1895년(고종32)  : 승당이 불에 타자 선학스님이 중건함. 

 
 1930년  :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불에 탐. 
 1950년  : 한국전쟁 때 사찰 내 전체 당우가 불에 탐.  

 2005년 : 4월 화재로 많은 전각 소실 

소임 한달도 안되었을때  큰 화재를 만난 정념 스님은 

 화재후 3000일만인 2013년 11월 24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 3000일 회향식을 하고 낙산사 회주직에서 물러남 
  

 

 

2005년 4월 화재 당시 소실된 전각,,,,,,,,,,,,,,,,,,,,,,,,,,,,,,,,.......복원 후에 모습

 

우리가 흔히 말 하길 "천년고찰" 이라 쉽게 말하는데

인간의 수명은 아주 많아야 백세 ,그것도 극히 드믈고 평균나이 60~정도인 것을 감안 하면

천년이 이라는 세월은 손꼽아 계산하기 어려운 무한대의 세월이 아닌가

 

그 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전란戰亂과 화재등 천재지변을 겪어오면서

한자리에서 굳굳이 기도도량으로 성성히 지탱해 온 것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신의 보살핌이 있지 않고는 어려울 것으로 여겨져 마음이 숙연해 진다

 

옛적 건물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넘치지만

근래들어 공원이나 유흥지 처럼 관광자원화 되고

교통이 자유로워 져서

옛날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는데

그 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자랑스러운 ,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간직해야할 문화유산으로 여기고

지금 현재의 모습이라도 한사람 한사람이 내것으로  소중히 여겨 후세에 물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솔밭 길

사진만 봐도 솔내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물이 없다

옛날 사진 보면 돌로 만든 동자승이 있고 동자승 손바닥에서 물이 나오게 되어 있던데,

 

 

낙산사 안내도와 출입문인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었는데 2005년 화재로 소실되고 그후 복원되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임금이 이곳까지 행차 할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 고생을 했을고,,

가마나 연을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왔을까,,

나는 ,,,참,,,걱정도 궁금증도 많다,,,늙은이라서 그런지,,,

 

홍예문 :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 되게 만든 .

 

 

 

 

 

 

 

 

 

 

 

감이 몇 개 열린 감나무, 고목이 되어 한쪽 은 죽었는가 했더니

아마도 2005년 화재에 그을려 시들어 가던 것이 한쪽이 다시 살아나 열매를 맺은 듯,

 

 

 

사천왕문 앞에 있는 이 굵은 나무들도 화재에 시달려 죽어가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라고,,

국토가  넓은 외국에서는 산불이 난 지역을 인위적으로 복원하거나 조림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두어

자연적으로 회복되길 기다린다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빈일루 옆 근행당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는  빈일루

 

 

조선 초기 세조를 위해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했다는 역사 깊은 동종 

무서운  불길에 보물 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면서 보물에서 지정 해제 되었다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되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될 수는 없었고,,
이때문에 보물 제 479호는 결번으로  남아있다고

 

2005년 4월 5일 불길에 녹아 내리는 동종,,,,,,,,,,,,,,,,,,,,,,,,,,,,,,,불타기전 예전 동종 모습

저 불길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고 안타까워 했을까나,,

 

 

원통보전으로 들어가는,,,

 

 

 

 

 

칠층석탑-보물 499호

의상대사가 처음 세울 때는 삼층석탑이던 것을 조선 세조가 7층으로 증축하면서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돌탑인 보물 7층 석탑은 무서운 화마에도 의연히 버티고 서있고 목재인 원통보전은 전소 되었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던 보물 1382호 인 건칠 관음보살상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지하시설로 피신시켜 무사 했다고,,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  제 1362호 (2003.02.03 지정

 

 

 

 

 

원통보전 뜨락의 연꽃 문양

 

 

 

 

 

 

 

정취전正趣殿-낙산사 종무소

 

빈일루와 원통보전 사이에  마당  양쪽에  정취전과 설선당이 있다

 

 

 

설선당說禪堂-선실, 승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