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 http://blog.daum.net/tkfkd1919/5976311
세종대왕릉에서 산길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 17대 효종(孝宗, 1619~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74) 장씨의 릉이 있다
원래 효종의 능도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었는데
1673년 현종 때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여주의 영릉(英陵) 곁으로 옮겼다.
한글로 하면 세종대왕릉도 효종대왕릉도 둘 다 "영릉"인데 한자로는
세종대왕릉은 영릉 英陵 이고 효종대왕릉은 녕릉寧陵 이다
어릴적 많이 갔었 던 곳,
참으로 오랜만에 이곳에 가 보았다
진입로 부터 달라져 있었다
매표소와 안내판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는 첫째 문,
또한번의 문을 거쳐야 홍살문에 이른다
훈민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이곳에 한쪽으론 동상과 재실이 있고 한쪽으론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그시대에 발명품을 전시한 세종전이 있다
재실
혼상(웬쪽) 과 간의(오른쪽)
간의:고도와 방위 낮과밤의 시각을 정밀하게 측정할수 있는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천체관측
기기이다. 원래 간의는 1276년 원나라의 곽수경이 처음 만든 천문의기로서 오늘날의 천체망원경
식으로 해,달,오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함>
혼상: 세종19년에 만든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의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수 있는 천체관측기기다
이 외에도 세종시대에 발명한 여러유물이 전시 되어 있다
세종전
자격루, 수표, 측우기
수표는 개울물의 수위를 재는 것이고 측우기는 강우량을 재는 것,
금천교와 홍살문
홍살문 바로 앞에 있는 금천교는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인 내부와 외부를
경계짓는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궁궐에도 정문을 들어서면 금천교가 있다
세종대왕릉은 옛날부터 능침 양쪽 낮은 계곡으로 늘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구능에도 가보면 낮은 계곡으로 수량이 풍부하게 흐르는 걸 볼 수 있다
왕릉 주변에 샘이 흐르는 곳이 명당일까?
여주 지역 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초등학교때 이 곳이 소풍장소였고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해 한글날 노래도 불렀었지,,,
그때는 일제 시대에서 벗어난지도 오래 되지 않았고 6,25 전쟁을 치른지도 얼마되지 않아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때이니 문화재를 가꾸는 일도 엄두를 못내던 시절이라 이곳 왕릉 잔듸 위에서 미끄럼도 타고 놀았다
그 때는 홍살문만 있었고 금천은 그냥 또랑이었고 그 밖으로는 지역주민이 농사 짓는 논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왕릉터를 넓혀 기념관도 지어 놓았는지,,
관리들이나 참배자가 능에 이르면 이 곳에서 먼저 절을 했다는 배위(판위)
기둥옆에 네모나게 만든 곳
참도
정자각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정자각은 제사를 모시는 곳인데 한자 정丁 자를 닮은 형식으로 지어져서 정자각이라 한다고,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가운데는 왕이 오르는 곳이고 양쪽 옆은 신하들이 오르는 곳으로
치장이 구분되어 있다
왕릉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소나무들이 왕릉을 향해 예를 표하는 것 처럼 굽어져 있다
한 족에는 나무들이 빽빽하고 반대쪽에는 나무가 없으니 나무 스스로 햇볓을 따라 저리 되었을 듯,,
세종대왕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명당 길지로 꼽힌다 한다
조선시대 왕릉중에 세종대왕릉인 영릉, 세조대왕릉인 광릉, 인조대왕릉인 장릉이, 명당으로 꼽힌다고
왕릉 봉분앞에서 앞을 내다 보아 보이는 풍경이 길지인지 가름한다고 하는데,,,
비각과 수복방
옛 영릉 터에서 출토된 세종대왕신도비(안평대군 글씨)는
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영릉 비각에는 영조 때인 1745년 세운 비석이 모셔져 있다
왕과 왕비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두 개 이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승하 후 광주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지금 태종대왕릉 옆 )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한다
세조때의 최양선이란 지관이 그곳이 좋은터가 아니니 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절사손장자(絶嗣孫長子}의 터라고 ,,후손이 끊기고 장자가 죽는다는 뜻,
그런중에 문종도 단명햇고 단종도 불행하게 되고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도 요절하고
예종의 맏아들도 어린나이에 잘못되어 예종 1년에 지금의 장소로 천장하게 되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이 곳이 천하 명당길지라 후세의 사람들은 조선이 적어도 백년은 더 연장되었을거라 한다
그러나 예종도1468년 9월 아버지인 세조가 죽기 직전 왕위에 올라 겨우 14개월만인 29세에 타게했다하니
그 짧은 기간에 왕실에 불행을 막아보고자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릉을 천장 하는 역사를 단행했으나
자신은 그 혜택을 보지 못했고 절사손장자의 터에서 벗어나서인가 세조의 장남의 자손이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전해 지는 설화 하나,
이곳으로 천장하면서도 이곳에 이미 다른 사람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자손이 잘 되어도 절대로 비각을 짓지마라 했다는데
정말로 자손들이 잘되니 비각을 크게 지었고
세종대왕의 묘자리를 보러 돌아 다니던 지관이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각으로 들어 비를 피하면서 보니 그곳이 천하 명당이라 그무덤을 이장하고 왕릉을 지었다고,
그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그무덤이 있단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지만
몇백년전 옛날 일을 자세히 알 길 없고 또 한번 무덤을 썻던 자리인데도 명당효과가 그대로 있는지도 의문이고,,
이 능은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고 한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병풍석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바뀐 것들도 있다.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되었으나 서거정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수복방 부엌
수복방은 릉을 지키는 이들의 숙소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가 숲에 있는 소나무 모양 한글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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