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이었을때 이곳에 다녀 왔는데 사진 올리는게 한참 늦었다
가을에는 추워지기전에 환자인 옆지기에게 볼거리, 운동을 하나라도 더 시키려고 하루 갔다와서 하루 쉬고 다음 날 또 나가고 하느라고
사진 찍어와서 저장만 해놓고 이걸 수정해서 올릴 시간이 없었던 것,,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기관으로
공자孔子(기원전 479~~551)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들을 길러내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태조 7년인 1398년에 처음 지었고 이후 여러번 고쳐지었다
고종 6년인 1869년에 크게 수리를 했는데 그모습이 현재 남아있다
문묘文廟는 공자의 사당이고 성균관成均館은 교육기관인데 이 둘을 묶어서 문묘 혹은 성균관이라 하였다
지방에 있는 공자의 사당과 중등교육 시설은 문묘 혹은 향교鄕校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24년)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즉위후 성균관으로 바뀌었는데
1356년(공민왕5년)에 국자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다
조선이 개국하게 되면서 조선왕조는 국가 이념인 주자학을 연구하고 보급할 기관이 필요하게 되엇고
이에 따라 유교적 교육을 위한 성현聖賢 봉사奉祀의 기능과 인재양성의 기능을 함께 가진 성균관을 설립하게 된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에 따라 숭교방 崇敎坊(명륜동)에 1395년 태조4년에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1398년에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 동재 東齋와 서재西齋 정록소 양현고養賢庫 식당 등이 완공 되었으나
정종 2년에(1400)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 되었고
그 뒤 1478년 (성종9년)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을 새로 건립하여 규모를 확대하였다
명륜당 앞에 있는 500여년이 된 은행나무
연산군 시절에는 창덕궁 후원에서 연회를 열 때 성균관의 유생들이 엿본다고 서재의 외면에 벽을 쌓게 하였고
공자의 위패를 철거하고 도성밖에 버렸다 한다
성균관도 도성밖으로 옮기려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위기를 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다시 소실된 것을 선조34년(1601)에 복구하기 시작하여 선조 35년에 대성전 39년에 명륜당을 중건 하였다
대궐에 비해 규모가 작긴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도 모두 불타 없어져 300년 가까이 복구 하지 못한채로 있었는데
제향과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바로 복구한 것 보면 예전에도 인재를 기르는 교육에 많이 힘을 쓴 것 같다
그 뒤로 계속 중건과 확장을 거쳐 영조 18년에 사도세자의 성균관입학 기념으로
왕의 친필을 새긴 탕평지를(반수교 옆에) 세우고 19년에 성균관에 나가 대사례大射禮를행한후
왕이 사용하던 활과 여러도구들을 육일각六一閣을 세워 보관했으며 당시 최고의교유기관 역할을 하였다
ㅡ몇년전 성균관스캔들 이라는 드라마에서 정조가 아버지가 즐겨 하셨던 놀이라고
자기도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에서 대사례를 하겠다고 했었지,,
드라마에서 나왔던 반수교가 도시개발로 지금은 흔적도 없는데 예전에는 성균관 주변을 빙 둘러 개울이 있었고
거기에 놓여 있던 다리가 반수교 였다 한다ㅡ
이후 고종 6년(1869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현재의 건물들은 선조대와 그 후에 지은 것이라 한다
성균관의 건물배치는 전제향前祭享 후강학後講學 으로
앞쪽은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제향곤간인 대성전 동무 서무 등이 배치되었으며
뒷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 서재와 스승들의 거처인 정록당등이 배치 되었다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 대학교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공자와 성현들을 뫼시는 사당인 문묘와 조선시대 대학당이었던 성균관이 있다
보이는 큰길로 주욱 가면 성균관 대학교 교정이고 문묘와 성균관을 들어갈려면 요기에서 뒤로 돌아 몇발짝 내려와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옆에 있는 문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이 문은 '신삼문" 이라 해서 사람들이 다닐수 없는 문이라 한다,,임금님도 못다닌다고,
보물 제 141호
서울 문묘및 성균관, 대성전, 동무,서무,삼문, 명륜당, 일괄 지정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천연기념물 제 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
중요무형문화제 제 85호;: 석전대제
성균관 대학 정문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유림회관이 있고 그쪽에 성균관과 대성전으로 들어 가는 문이 있다
동삼문 문 앞인 이곳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어서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많아 사진을 이렇게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웬쪽 닫혀있는 삼문이 "어삼문",,또는 동삼문 이라 하고 임금님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오른쪽 열려있는 문이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란다
임금님이 들어가는 문이긴 한데 올라가는 계단에 소맷돌은 없고 그냥 평범한 계단으로 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올라가는 계단에는 소맷돌이 있다
조금 더 가면 이런 문이 또 있고 우리는 이 문으로 들어 갔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성군관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가 나온다
동재 앞쪽,, 마당 오른쪽으로 있는 건물은 진사식당 저 끝에 건물을 정록청正錄廳 행랑채
기숙사인 동재 서재는
대성전 및 명륜당과 함께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되었다.
동·서재는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의 건물로서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재 건축 과정에서 방의 숫자를 32개로 늘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방·장의방·진사칸·하일방·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끝 방을 하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이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다.
성균관 학생들은 상론(商論)·재뢰(財賂)·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 :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 : 사학생도(四學生徒)와 같은 유학(幼學)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유생들의 교과목은 일정한 독서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서경』·『춘추』는 각 6개월, 『주역』·『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제반 경비는 양현고(養賢庫) 소속 토지 1,000결의 지세(地稅)로 충당하였는데,
지세는 흉년이 들면 반감 또는 전감하는 때가 많았다.
이 자료는 성균관 홈페이지에서 빌려옴
동 서재의 뒷쪽과 앞족 ,,작은 창문이 있고 북이 매달려 있는 곳이 뒷쪽이고 툇마루가 있는곳이 앞쪽 이다
댓돌위에 일렬로 세워져 있는 기둥이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는데도 저토록 아름답다니,,
나는 단청하지 않고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런 건물이 정감이 가고 참 좋다
맑은 물에 세수하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소녀의 순수한 얼굴 같아서,,
외국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건축기술, 특히 한옥 건축술을 보고 경이로워 한다고 한다
건물을 받치는 사방 기둥을 아무런 고정장치를 하지 않고 돌위에 그냥 올려놓았는데도 건물이 쓰러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몇백년을 지탱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 한다고 한다
500여년 동안 수많은 젊은 발길이 수없이 오르내렸을 마루로 올라가는 돌로 된 댓돌이 모서리가 달아 동그런 모양이 되었다
조기 위에 걸린 조그만 북이 기상과 식사 시간을 알렸던 북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원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여 적용하였다.
동재의 마루가 현재도 사람이 생활하는 것처럼 윤기나게 관리 되었는데
실제로 근대에 들어 성균관 대학이 들어서고 난 후에 기숙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다
(현재는 1960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학생 중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양현재생으로서 유학(儒學)의 맥을 계승하게 하고 있다.)
작은 창문은 이런 식으로 열었으며 오른쪽 사진에 창문 아래 있는 것은 아궁이
아궁이가 두개인데 양쪽으로 불을 때는게 아니고 한쪽은 연도(연기가 나가는 길)라 한다
이 건물은 굴뚝이 따로 없다는데 확인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가게 되면 확인하고 와야지,,,,
그런데 불을 때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연기가 나오면 매워서 어찌 했을지,,?
동재 옆에 있는 성균관 유생들의 식당인 진사 식당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정원을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명륜당 마루 천정에 걸려있는 수많은 편액들 , 어필도 여럿이 있다 하는데
그러나 나는 하나도 읽을 수 없는 어려운 문자 였고,,ㅎ
이런 귀한 것을 한글로 풀어 적어 걸어놓았으면 한자를 배우지 않은 어린 학생들도 읽고 뜻을 새길수 있어 좋을텐데,,아쉬움,,
성균관은 청렴의 상징으로 청 홍색의 단청만 하고 막새기와를 쓰지않고 벽도 청렴의 상징인 마름모꼴 무늬를 새겨 놓았다 한다
명륜당 앞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둥근 돌 두개는 관람자의 쉼터로 놓은 것이 아니고 성균관 유생들의 견책의 돌이라 한다
시험을 보고 점수 순서대로 시험지를 쌓아 놓으면 맨 아래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이 견책의 돌에 올라서서 반성 하였다 한다
오랜 세월을 그자리에 있었던 돌은 반질하게 달아 있었다,,
명륜당 앞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중종 때 대사성 및 동지관사를 역임한 윤탁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학생들에게 뿌리가 무성해야만 가지가 발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그 근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이다.
천영기념물 제 59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1519년에 심어졌으니 수령이 500여년이 되었다 한다
서쪽의 있는 나무는 높이 21m,중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7.3m라 한다
동쪽의 있는 나무는 전쟁의 피해로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각각의 가지가 본래의 줄기 크기만큼 자랐다 한다
은행나무는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를 천영기념물로 지정하는데 이 나무는 수나무라 한다
나무의 가슴높이 부분에 세개의 유주가 있는데 (호흡작용을 도와주는 줄기) 나무가 나이를 많이 먹었을때 생기는 것이라고,,
일설에 의하면 이 나무들은 예전에는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였다 한다
가을이 되면 열매가 떨러져 고약한 냄새가 나고 주변 반촌 사람들이 열매를 줏으러 들어와 시끄럽기도 해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지장을 준다고
학생들이 모여 제사를 올렸다나 기도를 하였대나 해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로 바뀌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통신~
예로부터 향교 문묘 사당등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한다
이 곳에도 명륜당 앞에, 대성전 앞에도 있는데 지금까지 명륜당 앞에 있는 나무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대성전 앞에 있는 나무도 서울시 천영기념물로 지정한다는 기사를 며칠 전에 보았다
기숙사 서재 뒷면::
동, 서재 기숙사는 명륜당 앞쪽 마당에 양쪽 동, 서로 나뉘어 있는데 명륜당 마당은 기숙사의 뒷쪽으로 되어 있다
보이는 창문 하나가 방 하나이고 .가로 세로가 237센치와 268센치의 방이 16개 씩이니 동서재 합해서 32개
성균관 학생이 200명씩도 되었다하니 조그만 방 하나에서 3명씩 살았는데 그게 최소인원이었다니 저 방에서 몇명이나 있었는지,,
서재 앞면 은 한적한 후원이다
존경각尊經閣 ~~육일각六一閣
성균관의 경전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명륜당 동북쪽에 있다
1475(성종 6)년에 한명회의 건의로 창건 하였고 성종임금은 수만권의 책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존경각 건물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데 수만권이나 되는 서적을 어떻게 보관 하였는지,,,
1514중종 9년에 소실되어 복원했으나 임진왜란때 다시 소실되어 1621광해 13년에 중건 하였고1772영조 48년에 개축 하였다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효시로 조선시대 말 가지 400여년 동안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한다,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향관청의 서쪽에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명륜당의 동북쪽으로 이건하였다.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藝(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일각이란 명칭도 육례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정해진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 대사례를 햇던 것처럼,,
정록청正錄廳은
명륜당 동쪽에 남향, 8간(間)으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되었다.
성균관 선생님들이 거처하던 공간 이라고
국가에서는 태학을 설립하고 담당 참하관(參下官)으로 하여금 현신정치의 중대한 문제들을 기록하게 하여 현책(玄冊)이라 이름하고
상자 속에 봉인하고 출납을 금지하였는데 임란 이후에는 폐지하고 그 후로는 참하관들의 임명과 퇴임에 대한 기록 및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록청 뒷쪽
건물의 굴뚝이 모두 처마밖으로 올려져 있는데 이 굴뚝은 뒷벽에 바로 대어 처마 안쪽으로 세워져 있어 건물이 연기에 그을렸을 것 같은데
원래 이렇게 지어진 것인지 소실된 것을 복원하면서 이런식으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향관청享官廳
문묘 제사 때에 제관(祭官)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봉안하던 곳으로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간(間)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되었다.
대청 중앙에는 제사에 쓰이는 향축(香祝)을 봉안하고 좌우의 협실은 헌관방(獻官房)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향관청의 좌우에는 평소에는 동서재가 좁았으므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고,
제사시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등, 유사들이 사용하던 동·서향 6간(間)으로 건조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이 있다.
향관청 마당에 양쪽으로 있는 건물이 동월랑 서월랑,,
성균관을 들어가서 제일 궁금 했던 곳이 향관청이었다,,
몇년 전 방영 되었던 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윤희가 남장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
여인이라는게 발각된 곳이 향관청이었기에,,,,
여인임을 눈치채고 있었던 구용하라는 선배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으슥하고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고 무심한 듯 이야기 했고
윤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다 문재신에게 들켜 버린 것
그러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향관청과는 건물 모양이 다르게 생겨서 아마도 이 곳에서 촬영 했던 것은 아닌 듯 한데
기숙사나 명륜당에서 멀찌감치 있는 것은 맞다
드라마 촬영은 전주 향교에서 했다고 들었다
동월랑 서월랑은 향관청 마당에서 각기 바깥쪽을 향해 있고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앞쪽과 뒷쪽
대성전 앞에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두 길로 각기 다른쪽에서 들어오며 올라가는 계단도 구별되어 있다
사진에 보이는 웬쪽길은 대성전 정문인 신삼문에서 들어 오는 신도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은 임금이 다니는 문인 동삼문에서 오는 어도 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6년(1397)에 문묘의 창건을 명하였으며,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의 정전(正殿)으로서 공 부자(孔夫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공 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正位)로 하여 4성(聖)과 공부자의 제자 10철(哲), 송조육현(宋朝六賢),
사성四聖이란
연국 복성공 안자(國 復聖公 顔子)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공자의 제자
성국 종성공 증자(郕國宗聖公曾子)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공자의제자
기국 술성공 자사(沂國 述聖公 子思)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공자의 적손
추국 아성공 맹자(鄒國 亞聖公 孟子, BC 372 - 289)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位次奉安)되어 있으며,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釋奠)을 지낸다.
현재, 전국의 모든 향교(鄕校)에도 석전을 모시고 있다.
그 가운데 성균관의 문묘는 국가의 대표 문묘로서 건축양식과 위패 등, 규모와 격식이 가장 웅장하다.
대성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 10시에 분향례(焚香禮)를 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제례(祭禮)를 거행하는데, 이것을 석전(釋奠)이라고 한다.
석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동삼문, 또는 어삼문에서 들어 오는 길은 두 길 로 되어 있고 한쪽길은 넓고 한쪽길은 좁게 되어 있는데
넓은 길은 임금의 길이고 좁은 길은 세자가 다니게 되어 있는 길이라 한다
성균관은 옛 성현(聖賢)들에 대한 배향(配享)공간과 교육공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대성전은 배향공간에 속한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 모두 설치되어 있으나,
성균관 내의 대성전이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완비되고 규모가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삼문에서 들어 오는 길
삼강 오륜 나무
대성전 앞에 양쪽으로 편백나무 한 그루씩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나무는 가지가 세개로 뻗어 있고
윈쪽에 있는 나무는 가지가 다섯개로 되어 있어 성전앞에 있는 삼강오륜나무라 한다고 한다
서무西廡,,,,,,,,,,,,,,,,,,,,,,,,,,,,,,,,,,,,,,,,,,,,,,,,,,,,,,,,,,,동무(東廡
태조의 한양 천도 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대성전의 좌·우측에 있으며,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이다. 각각 11간(間)으로서 맞배지붕 양식이다.
동,·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의 한(漢)·당(唐)·송(宋)·원(元)의 제현(諸賢)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동·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 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서무는 비어 있다.
대성전 신삼문 양쪽으로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 이나무 뒤로 신삼문이 있다
이 두 나무도 서울시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관리할 거라 한다
오른쪽 옆으로 묘정비각이 있는데 제대로 사진에 잡히지 않았다
고목처럼 된 이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지낸다는 주목이라 하고
현재 이 나무의 수령이 천년쯤 되었다 하는데 고사목 같은 등걸을 하고 있지만 살아 있다
나무 뒷쪽으로 조금 보이는 건물은 제기고,,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를 보관했던 곳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종(從)들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대성전의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간(間)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다.
현판에는 재학당載學堂 이라고 되어 있는데 수복청守僕廳이라고도 하고 근관직청近官直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전사청典祀廳
석전 때에 희생(犧牲)(제수용품)을 준비하던 곳으로서 성종 3년(1472)에 대사성(大司成) 이극기(李克基) 등의 요청에 의하여
대성전 서쪽에 동향, 6간(間) 규모로 건립되었고 1986년 고종에 복원 하였다
↓ 비천당丕闡堂은 과거 시험을 보던 곳으로 명륜당 서쪽으로 서재쪽에서 사잇문을 열고 나가야 있다
현종 5년 1664년에 민정중에 건의로 건립 되었으며 서쪽과 남쪽의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으나 한국전쟁인 6.25 전쟁때 소실되어
1988년에 비천당만 복원 되었다
비천당은 제1과장인 명륜당과 함께 제2과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명륜전문학교 설립후에는 교실과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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