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옥재 集玉齋
청국과 조선의 견축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5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 했다
이때 창덕궁 함녕전에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 등을 1891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짓고 서재와 외국사신 접견장소로 사용하였다 한다
집옥재는 양 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협길당協吉堂은 고종의 침실로 사용되었고 팔우정八隅亭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
이 건물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 되었다
집옥재 현판이 다른 전각과 달리 세로로 글이 씌어진 것도 청나라 양식이라고 한다
집옥재 영역도 신무문과 함께 금지 구역이었으나 신무문 통행이 해제 되면서 이 곳도 일반 관람이 허락된 곳이다
의문 :: 창덕궁 함녕전에서 옮겨 왔다고 되어 있는데 창덕궁 함녕전은 검색에 나오지 않고 덕수궁 함녕전이 검색되나
자세한 것은 찾지 못했다
참고로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한다
경복궁 이야기 장안당 곤녕합 http://blog.daum.net/tkfkd1919/5977046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집옥재 지붕 위 양쪽에 있는 형상
어떤 자료에는 용의 둘째 아들 이라고,,,?
경복궁에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제왕의 궁에는 4개의 문을 두는 역대의 궁성제도에 따라 세종 15년(1433)에 창건되었다.
성종 6년(1475)에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의 건의로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자연계를 지켜주는 네 마리 신령한 동물 중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를 뜻한다고,,.
참고로 대궐에는 동쪽은 좌청룡(左靑龍), 서쪽은 우백호(右白虎), 남쪽은 남주작(南朱雀), 북쪽은 북현무(北玄武)라고 하며,
이들 사신 四神이 수호신처럼 배치 되어 있다
(청룡은 용이고 백호는 호랑이 주작은 봉황 현무는 거북이)
북문인 신무문은 평민인 백성들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고 한다
대궐의 문은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향오문, 등 삼문으로 되어있는 문도
지금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는 가운데 문은 임금만이 다닐 수 있던 문이고
삼문중에 동쪽으로 있는 쪽은 문신이, 서쪽으로 있는 쪽은 무신이 다니게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대궐에서는 동쪽을 서쪽에 비해 우위에 두었던 것 보면
해가 기우는 서쪽에 비해 해가 솟아 오르는 동쪽을 길 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신무문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소실되어 고종 2년(1865) 9월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함께 재건되었다.
신무문神武門을 나가면 찻길 하나 건너에 청와대 정문이 있다
지금은 신무문 까지만 경복궁인 것 처럼 찻길로 가로 막혀 있으나 원래는 청와대 자리까지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뒤, 그 뒤편 언덕위에 평지를 "무예를 구경하는 대"라는 의미에서 경무대景武臺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위에는 융무당과 융문당의 건물을 지었고, 친경전親耕田 (내농원內農圓임금이 몸소 경작하는 논밭) 도 마련했다
문무가 융성하고 산업이 발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왕과 신하들이 활쏘기를 하거나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대臺란 평지보다 높은 곳에 만든 평평한 구조물을 말함이고
이런 구조물은 하늘을 올려다 보거나 땅을 굽어보기 위해 만든다
감히 생각할수도 없는 처참하고 참담했던 을미사변의 참사이후 1896년 고종은 도망치듯 경복궁을 떠났고
역사에는 그것이 아관파천이라 기록되었고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뒤 경무대위에 건물도 궁궐의 다른전각과 같이 퇴락해 갔고
일제가 광화문을 헐고 총독부를 지으면서 현 청와대자리인 이 곳의 건물을 모조리 헐어내고
1939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경무대에 새 관저를 지었다
그 뒤로 경무대는 금단의 지역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경무대가 지명地名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총독관저는 해방 뒤 주한미군 사령관이 머물다가 정부수립후 대통령관저가 되었다
경무대가 건물 이름이 아니고 지명이었으니 정확히는 "경무대 대통령 관저" 였으나
이곳에 다른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경무대가 관저 명칭처럼 사용되었다
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가 전 정권 폭정을 자행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원부怨府 같은 인상을 주기때문에 청와대로 게칭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지명을 건물명으로 잘못 안 탓이겠지만 어쨋거니 이후 대통령 관저는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1929년 노산 이은상은 안타까운 마음에 "경무대를 지나며: 연작시조"를 를 지었다 한다
"가슴에 품은 뜻이 얼마나 많았던가,
남긴 일 무엇인지 알길이 전혀 없네
누구서 위국충절이 장하였다 하는고"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한지 28년 만인 1896년
왕세자와 함께 궁내용 교자를 타고 바로 신무문을 통해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던 곳이기도,,
그후 고종은 경복궁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 조선의 볍궁이며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주인을 잃고
침략자에 의해 무참히 훼손 되었던 것,,,,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경복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청와대 정문과 마주한 신무문 주변에 대통령 경호를 위한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금족지禁足地로 남아 있었다.
신무문이 청와대 정문과 길 하나 사이로 마주 하고 있으니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30경비단이 신무문 내 태원전 영역에 주둔했던 이래
지난 45년 동안 ‘보안과 경호’의 이유로 굳게 닫혀 있었다.
신무문이 다시 열린 것은 노무현 정부인 참여정부때이다
2006년 9월 28일부터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개방되면서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의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난 ‘06.2.12 시범답사를 통해 보안상의 이유로 그동안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던 청와대 뒷산 북악산 일원을
38년 만에 공개(‘07년 4월부터 전면 개방)한데 이어, 이번에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개방함으로써
경복궁 일원과 청와대 그리고 북악산 일원이 하나의 코스로 연결되게 됐다.
이 외국 관광객은 어떤 생각으로 이 풍경을 바라보는지,,
잉글리쉬,,,,가 되면 물어 보았을텐대,,,ㅎ
청와대 자리까지 다 궁궐영역으로 복원이 되었다면,,,아니 외세의 침략으로 소실되지 않고 원래 대로 있었다면
외국 관광객에게도 자랑스러운 공간이 되었을텐데,,,아쉬움,,
예전 이 곳이 금지 구역일때 청와대 사진을 이렇게 올렸으면 남산 분실 지하로 잡혀가서 고문 당했을지도,,ㅋ
경복궁 후원이었던 청와대 자리에 있던 융무당과← →융문당
신무문 표지석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가면 집옥재 신무문이 나오고
표지석 뒷쪽으로 주욱 넘어가면 태원전 가는 길이다
태원전(泰元殿)
태원전은 경복궁 서북쪽 끝에 붙어 있는 가장 은밀한 전각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처음 대궐을 지을당시는 없던 건물인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인 고종 5년1868년에 건립된 곳으로
태원전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이다
고종임금 치세에 이곳이 두 번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다
고종27년 (1890) 4월 자경전 뒷쪽 지금 복원중인 흥복전에서 신정왕후 조대비가 승하하여 태원전이 빈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4월 17일 승하 하였는데 같은해 8월 30일 발인 했다하니 그동안 태원전에 모셔져 있었던 것,
건청궁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의 빈전도 이 곳이었는데 고종이 있던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다시 이곳으로 모셔 와
1896 7월 승하 하였는데 해를 넘겨 이듬해인 1897년 10월에 발인을 했다 한다
보통 국상기간이 5개월 정도 되었는데 명성황후 국장이 조선왕조 전반을 거쳐 가장 길었던 것은
유해가 훼손되어 찾아 뫼시는데도 시일이 갈렸을 것으로 보여지며 그때의 왕실이나 나라사정이 어렵기도 했었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시해 당한 국모의 애도기간을 오래 지속함으로 국민들의 애국심과 결속을 유도 했던 것일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남쪽에는 건용문(建庸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고 .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된 것인데 완벽한 100% 복원은 아닌 것,
태원전 담장 밖에 빈터로 남아 이는 공간이 모두 부속 전각이 있었던 곳,,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30경비단이 태원전 영역에 주둔했었고 12,12 사태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지금의 태원전 건물이 아니고 그 당시 정부에서 태원전 영역 빈자리에 건물을 세우고 사용했었고
노태우 대통령당시 수도경비대 이전과 함께 건물이 다 헐리고 그 이후 태원전이 복원된 것이다
건숙문健肅門 사진펌 문화재청
이 앞에 잔디를 입힌 곳이 모두 태원전 부속건물이 있던 곳
지금의 대궐안에 빈터로 있으면서 직사각형으로 구획을 짓고 잔디를 입혀놓은 곳은 모두 다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라고
경안문 景安門
건숙문을 지나 경안문을 들어서면
바로 회랑(천랑) 으로 이어지고 이 끝에 태원전이 있다
태조의 어진을 봉았했던 태원전
국상이 나면 왕자들은 소복을 입고 3일 동안 금식을 했다고 한다
왕의 유해는 정갈하게 하여 수의를 입히고 시신 아래에 얼음을 넣어 부패를 막고
장례기간이 5개월여가 걸리기 때문에 그후 입관하기까지 수의를 계속 입히는데 90벌이나 입혔고
입관이 끝나야 왕세자는 국새를 받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에 시신이 능에 묻히게 되면 왕의 혼을 담은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지내고 나야 상이 끝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장례절차가 이러했으니 병약한 왕세자는 그로 인해 병을 얻어 일찍 절명 하기도 ,,5대 문종 8대 예종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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