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돌이의 혼은. 추위와 물결을 몰고 온다.
용두돈대 바로 밑을 흐르는 곳이 물이 빙빙 돌며 파도가 험하기로 '유명한 손돌 목이다.
고려 공민왕때 홍건적이 침입하여 공민왕이 개경에서 피난길가는 뱃길에서 생긴 사건이라 하기도 하고
고려때의 왕이 파천 가던 길이였다고도 한다.
임금이 난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로 가는 뱃길에 오르게 되었다.
불의의 난을 당해 서울 중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인조대왕의 용안은 수심과 슬픈 빛을 띄우고
그저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며 배 밑이 꺼질듯 한숨만 쉬었다. 손돌의 노젓는 솜씨는 다른 사공과 달라 어느새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 섬이 저 멀리 나타났고 여울의 급류가 시작되는 손돌목에 다다르자 물살이 점차 세고 거칠어지자 임금은 배를 강기슭으로 돌려 천천히 저어 가라 했다.
손돌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지만 배는 더욱 흔들리며 여울물을 따라 내려가자
불안한 임금은 도승지에게 다시 사공에게 말을 해보라 했고
도승지의 말을 전해들은 손 돌은 염려 말라며 계속 여울 쪽으로만 배를 몰아가자
의심이든 임금은 사공을 꾸짖으며 "어찌 위험한곳으로만 배를 모느냐" 며 가장 자리로 가자 하여도
손돌은 아니 된다며 저기 저 급한 여울목을 무사히 빠져 나가는 길은 이길 한곳이라고 아뢰자
구중궁궐에서 정사는 다스릴 수 있으나 뱃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임금은 손돌이를 의심 사공에 목을 베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손돌은 끝내 쇤네를 믿지 못하시니 무어라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하며 한 가지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임금이 무엇이냐고 묻자 손돌은 예까지 마마를 모시고 왔다가 이제 조금 남은 앞길을 더 모시지 못함을 원통하게 생각하옵니다.
이제 소인이 죽기 전 단 한 말씀 아뢸 것이 있사온데 소인이 죽은 뒤에 배가 뱃길을 끊기 쉬우니
그땐 저 바가지를 물위에 띄우시고 바가지가 흘러 가는대로만 가소서.
손돌이 죽자 갑자기 세찬바람이 불며 물결이 세차지자
평소에 노를 저어본일이 없는 신하들이 아무리 노를 저어 봐도 세찬 여울 속으로 밀려들자
신하들은 손돌이 말한대로 바가지를 띄우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대로 노를 저어가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무사히 도착한 임금은 죄 없는 손돌을 의심해 죽인 것을 후회하며 손돌을 김포쪽 강가 야산에 묻어주고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원혼을 위로해 주었다한다.
지금도 억울하게 희생된 그때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을 "손돌 목' 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20일 경이면 강추위가 오는데 이 추위를 "손돌 추위" 라고 전해온다.
손돌 목의 묘는 강화도 용두돈대와 마주보는 김포 대명리 덕포진 안에 있다.
덕포진은 김포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화의 진에 예속되어 있던 진이다.
http://kr.blog.yahoo.com/ganghwaro/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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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글에서 손돌목이라 는것은 ,여울목,과 같은 물살이 빠른곳의 지명인데 강화도 ,울돌목,근처의 있다 하구요
덕포진에 있는 무덤은 빈 무덤 이라고도 합니다
임금이 나중에서야 사공이 억울하게 죽은 걸 알고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어서
빈무덤이라도 만들어 원혼을 달래자 하고 만들었다 합니다,
시대는 고려시대 몽고란을 피해 자연도(용두도)가던중에 있었던 일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 라고도 하구,인조대왕이라는 부분도 정확한 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손돌묘는 몇 년 전에 제가 김포 덕포진에 가서 본적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