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경강선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진 여주 벽절 ,,신륵사 ,2016,11,8일

L일순 2016. 11. 14. 10:00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東臺위에 서 있는
 전탑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1944년 생인 내가 어렸을때도 벽절이라고 했었다

지금도 여주 시골 동네에서는  신륵사라고 하지 않고 벽절이라고 한다

내가 어렸을때부터 있었던 절이기는 했지만 역사가 이래 깊은 줄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역사 깊은 사찰이다 보니 보물급 문화재도 여러기가 있었다

보물 제 180호ㅡ 신륵사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 225호ㅡ 다층석탑 多層石塔

보물제226호ㅡ 신륵사 다층전탑 多層塼塔

보물 제228호(1379)ㅡ신륵사보제존자석종 普濟尊者 石鐘

보물 제229호ㅡ보제존자석종비 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ㅡ대당각기비 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ㅡ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石燈
보물 제1791호ㅡ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極樂寶殿







일주문 양쪽 기둥에 새겨진 글


ㅡ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에서유래 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다  겉잡을 수 없이 사나움으로
 이를 삶드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 하였다 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쳬 신륵사라고 하였다 한다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의 자리 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깁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ㅡ



일주문을 지나서





이곳은  템플스테이 숙소인 듯









ㅡ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ㅡ






ㅡ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ㅡ




명부전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사당과 600년된 향나무





명부전




조사당


ㅡ신륵사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다
세 분 선사는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이건물은 전체적으로 현란하지 않으며
구조적으로 견실한 느낌을 주는 조선초기  다포집 형태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 보물 제 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제존자진당시병서 에 의하면 고려 우왕 5년 (1397)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제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지공, 그리고 좌우에 무학과 나옹스님이 영정을 봉안해 두고 있으며
 중앙 지공 화상의 영정 앞은 목조로 된 나옹스님이 독존獨尊을 안치 되어 있다ㅡ










ㅡ보물 제 225호 다층석탑 多層石塔 높이 3미터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은 흰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특이한 예로
조형 감각이 뛰어난 매우 우아한 석탑이다
현재 탑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아랫부분에 새겨진 용과 구름문양의 세부 조각은 우수한 기량을 보이고 있다


 현재 파고다 공원내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과(조선 세조 12년 1466년조성 국보 제2호)
양수리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성종24년 1493년 조성)이 재질과 세부 양식면에서
신륵사 다층석탑과 공통점을 갖고 있는 점 을 본다면
이 탑은 영릉의 원찰로 지정 되었던 성종 3년 1472 중창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된다


현재 탑의 위치는 사찰의 구조로 볼때 처음 조성 당시부터 있던 원래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 되나
워낙 자연환경에 약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상륜부 역시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현재 보다는 몇층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ㅡ


나는  대리석으로 지은  탑은 처음 보았다







탑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 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2009년 극락보전이 해체 보수 되었다고,,


신륵사에서 20여리 떨어진 곳, 여주 한적한 시골 마을이 고향인 내가 어렸을때 아마도 열살 안팍 즈음일까

나무 수국이(불두화)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 날

외할머니와 친척분들과 함께 처음으로 벽절에(신륵사) 놀러 갔었다

그 때 절에 깨끗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있던 것 보면 아마도 사월 초파일 이었던 듯

그 때 대웅전은 조그마하게 지금 명부전 건물만 했었다

대웅전 뜨락 아래로 어른 키보다 더 컷던 수국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사발 덩이만한 탐스러운 흰 꽃들이 주렁 주렁 피어 있어서 얼마나 아름 다웠던지,,

그 아래로 樓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도 조그마 했었다

지금 있는 극락보전이나 구룡루는 그때의 건물이 아니다


어렸을때 보았던 벽절 풍경을 생각하고 몇해전에 오랜만에 가보고는

너무 많이 변한 모습에 놀라고 정감이 없어지기도 했었는데,,,


올해 가보니 그때 보다 더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엔 절만 있어서  강변 경치도 좋았었는데 주변으로 건물이 많이 들어서고 완전 도시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옛날 그때 것으로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밖에 없는 것 같았다

세월이 달라지니 변하는 걸 어찌 할 수 없고 사찰로서는 주변이 발전해서 사람들 왕래도 많아지고 좋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이 그리운  나그네는 번화 해 진 것이 오히려 조금 헛헛한 마음이다


대웅전 앞에 있던 여러 그루의 수국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무도 늙어서 죽어 버렸을까

몇 그루라도 다시 심어 가꾸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외할머니 치맛자락 잡고 두리번 거리던 열살 꼬맹이인 나도

열여덞 푸른 나이었던 나도 보았을 은행나무

몇 년 전 오랜만에 다시 찾았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반가워 눈물이 나려고 했었다


할머니와의 추억속에 박혀 있는 나무는 흐드러지게 피었던 목수국이고

열여덟 예쁜 나이에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속에 있는 나무는

노란 색으로 물들어 주변을 환하게 밝혔던  커다란 은행나무이다 


나무의 나이 600년이라 하니 내 나이보다 아홉배  쯤은 더 많다,,

몇 년 전 다녀와서 너무 변한 사찰이나 주변 풍경에  기억에서 지웠던 곳이지만

경강선 전철이 생기고 교통이 쉬워져서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던 곳


은행나무 노란단풍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서둘러 갔는데 나무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늙으면 체구가 작아 지는데 나무도 그러한지

열여덟 살에 보았던 성성햇던 모습 보다는 조금 여위어 보여 마음이 아릿하다


이제 해마다 푸르른 봄날도 단풍드는 가을도 다시 이 나무를 만나러 오고 싶다

할머니의 모습도, 같이 왔던 친구의 모습도 행여 만나려나 싶어 ~~


경강선 여주 역에 내리면 이곳을 비롯한 목아 박물관 명성황후 생가 등을 가는 순환버스가 10월 27일 개통 되었다

역에서 왕복표를 사게 되어 있고 요금은 3000원이다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한다

그런데 이 건물이 내가 어렸을때 보았던 것 보다는 많이 커다랗게 보이니

아마도 극락보전 중수 하면서 이 건물도 크게 새로 짓지 않았을까 싶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 세워진   강월헌(江月軒

 예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 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인 듯


이 정자의 높이가 강물보다 한참 위에 있는데 홍수로 물이 이 곳까지 올라와서 정자가 떠내려 갈 정도였다면

여주 시내에도 큰 피해가 났겠다 싶다

1972년 이면 나도 알겠는 일이었을텐데,,


할머니와 같이 왔을때는 저 아래 강변에서 유람선을 탔었고

친구와 같이 왔을때도 여주에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 나룻배를 타고 건넜었지,,











보물제226호 신륵사 다층석탑多層塼塔


신륵사 경내에 동남쪽 강가에 동산위에 세워진 이 전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라 한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 탑을 쌓은 것으로 주로 중국의 탑들이 여기에 속한다
벽돌로 된 탑이 있다는 의미로 신륵사는 예로부터 벽절擘寺이라고 불리었다


강 상류의 댐이 건설되기전에는 절벽 아랫부분의 강물이 매우 거세었다고 전하므로
강 절벽에 조성된 탑은 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반원안에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구성 자체는 수리를 거듭 하는 사이에 원형을 잃어 당초문양의 배열조합이 훼손되었다 한다
이 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벽돌의 문양과 전체적인 형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 건축 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륵사 동탑중수비의 기록에 따라
조선 영조2년1726 에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다


사찰의 중심구역이 아닌 사찰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별개의 장소에 이 탑을 건립한 것은
신라 말 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자생적인 풍수지리설에 영향으로 생각된다고,,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