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대교(影島大橋, Yeongdo bridge)는
1934년 11월 23일에 길이 약 214.63m, 너비 약 18m로 준공되었다.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며, 일제시대와 전쟁의 수탈과 애환 그리고 이산과 실향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리이다.
개통 당시는 다리 이름이 부산대교였으나, 1980년 1월 30일 부산대교가 개통되어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도대교는 부산 최초로 건설된 연륙교이며 한국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형식의 다리이다.
개통 당시에는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록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했다.
다리가 개통될당시 육지쪽(중앙동) 다리 31.30m를 하루 2~7차례 들어 올렸으며,
도개속도는 고속(1분 30초), 저속(4분) 2가지가 있었다.
1930년대에 6만인파가 모였다는 것은 어마 어마한 일이지요
1930년대 일제는 부산 영도에 조선소를 지어 군수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뭍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했다,하지만 부산항을 드나들던 해운업자들은 "다리를 놓으면 큰 배는 돌아가야 한다"며
강력히 항의했다,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도개교.
도개교란 다리 상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교량을 말한다.
1934년 11월 23일,부산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6만여 명이 개통식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영도다리의 공식명칭은 "부산대교"였다 그러다 1980년 새로운 부산대교가 생기면서
"영도대교"로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도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할 것이다.
영도다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실향민의 한 맺힌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51년 1.4후퇴때 이북 주민들은 사랑하는 가족,친지들과 뿔뿔이 흩어져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이들이 알 만한 한강 이남의 지명이 별로 없었기에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했겠지
약속은 그렇게 했지만 혼란의 와중에 그게 그리 쉽지 않았겠지
만나고자 했던 가족은 만나지 못하고 빈 몸으로 떠밀려온 팍팍하고 고단한 피난 살이에
기다림에 지쳐 투신한 사람들의 보따리가 다리 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다고 전해 지기도,,
영도다리는 1966년 영도로 향하는 상수도관이 부착되면서 상판 들어올리기를 멈췄다.
새로 건설된 이 다리는 롯데 그룹이 부산에 유통업 진출을 계기로 늘어 날 교통량 증가를 감안 하여
부산시와 협의하여 기부채납 형식으로 지었다 한다
예전에 영도다리는 수동 으로 올렷다 내렸다 했는데 새로 지어진 다리는 자동 시스템으로 지어 졌다고,,
노래 / 현인
제목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보자
ㅡ가슴을 저미는 노랫말이다.
금순이는 만났을까,,,ㅜ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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