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융희 1)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하여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한 활동(→ 색인 : 한국사).
망국의 황제 고종은 나라를 빼앗긴 억울함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1906년 4월 에도
해외 각국에 밀사를 보냈으나
모두 허사로 끝났다고 합니다
개요
이 활동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간의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어버렸다.
배경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파견과정
고종은 전(前) 의정부참판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주(駐)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과 이위종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와 답지했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논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韓)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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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국내에서는 밀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이 이로 말미암아
현지에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했다고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준 열사는 분사한 게 아니라 병사(病死)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5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내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내용은 이준열사가 만국박람회 현장에서 연설을 하고
그 자리에서 활복을 하였다는 내용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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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후 이들은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결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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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들은 헤이그 밀사 파견이 고종이 한 것이 아니라는 훗날 역사가들의 논쟁의 일부 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신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취재 과정에서 만난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의 담당자 하이데브링크씨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세 사람이
헤이그에서 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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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장의 어새를 위조했다니...
하지만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서울에서 제기됐다. 서지학자인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는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도장인 어새(御璽)는 진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황제의 다른 친서와 비교해볼 때 전각의 글자체가 크게 다르고,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붓으로
그려 번진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전각 전문가인 정병례 고암전각예술원장도 사진을 본 뒤 “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다른 문서의 어새와는 완전히 다르다”
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어설픈 실력으로 만든 모작(模作)”이라고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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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태진 교수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
어떻게 된 것일까?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내가 보기에도 신임장의 어새와 수결 모양은 이상하다. 그러나
황명(皇命)이 없이 특사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임장에 고종의 의중이 들어 있었을 것이고,
임무를 구두로 전달하고 나중에 적게 한 백지 위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물샐틈없이 황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르칠 경우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고종으로선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고, 촉박한 만국평화회의의 일정에 발을 구르던 밀사들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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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헤이그 특사 처벌 지시
승정원일기 고종 44년 (1907년, 광무 11)
6월 11일(경오, 양력 7월 20일 토요일)
이상설 등을 율문대로 엄히 처벌하라는 조령
○ 조령을 내리기를,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의 무리는 어떤 흉악한 심보를 타고났으며 어떤 음모를 품었단 말인가.
몰래 해외로 침투하여 밀사(密使)를 사칭하고 각국을 현혹하여 하마터면 나라 외교를 망쳐 놓을 뻔하였으니,
그들이 한 짓을 따져 보면 중죄를 받아 마땅하다. 법부로 하여금 율문대로 엄히 처벌하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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