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일상

옛날 명절 풍경,,,,내 어린 시절 설날

L일순 2010. 2. 13. 01:39

내가 어린 시절 이맘때는

온 동네가 명절 준비로 분주하고 떠들 썩 하곤 해서

어린 아이들은 날마다 손꼽아 명절을 기다리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나이라 뭘 몰라서 떡도 하고 부침개도 부치고

재수 좋으면 새 옷도 한 벌씩 얻어 입는 명절이 돌아오는 게  마냥 기쁘고 들뜨는 일이었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집안에선  끼니 꺼리도 모자라서 하루 세끼를 먹고 사는 집도 드물었던 시절

가을 추수해서 거두어 들여 놓고는 다음해 농사가 시작 되기 전 까지는

별다른 일거리도 없고 수입도 없으니 아침에만 겨우 밥을 해서 먹고는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시래기 죽이나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형편이니

어른들 입장에선 명절 돌아오는 게 기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년 중 큰 명절인 설날을 소홀히 지낼 수야 없는 일,,,,,,


음력 섣달 들어서면 어머니 들은 바빠지기 시작했지,,

식구들 새 옷 한 벌씩 해 입히면 더 없이 좋을 일이지만

입던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손질해서 새로 지어 장롱 속에 넣어놓고

짧은 겨울 해를 붙들어 가며 먹을거리 만들기에 분주 해 진다 .

엿도 고고, 조청도 만들고, 술도 빚고,,,,

양식이 귀하던 때이니 엿을 만드는것은 쌀로 만들지 않고

쌀 방아를 찧을 때 쌀 알갱이가 조금씩 부서져서 나오는 싸래기(쌀 토막 난 것)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엿을 만들고 조청을 만들고 했었다.


스무 날쯤 되면 떡국 끓일 떡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떡을 만들어 주는 방앗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동네에 하나씩 있는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정미소에서

쌀이 찧어져 나오는 곳에 빙글 빙글 돌려있는 쇠절구공이 같은 부속을 하나 끼우고

떡을 만들었다

지금은 쌀을 곱게 가루로 빻아서 가루를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할 줄 모르고 쌀을 그냥 큰 시루에 넣고 솥 위에  시루를 앉혀서

김을 올려 쪄서 고두밥이 된 것을 가지고 바로 기계에 넣어 돌려 떡 가래를 뽑아내었다.

시루에 찐 밥을 떡을 잘 만들려면 그것이 식어지기 전에 뜨거울 때

기계에 쏟아 부어서 해야 떡가래가 매끈하게 잘 나오지

밥이 식은 다음에 하면 밥알이 잘 뭉개지지가 않아서 떡가래가 매끈하질 않고

밥알이 그냥 붙어있는 떡이 되곤 했었다.


떡을 하려면 온 동네가 하루에 전부 다 해야 했는데

방앗간에서 어느 날이 떡 하는 날이라고 날을 잡아 놓으면

집집마다 그 날에 맞추어서 떡쌀을 담궈 불려서 큰 시루에 고두밥을 쪄 놓고는

그 것이 뜨거울 때 기계에 부어서 떡을 빼야  하기 때문에 식구 중에 한 사람은

 방앗간에 가서 줄을 서서 차례를 맡아 두었다가

내 차례가 되면 얼른 집에다 알려서 집에서는 식지 않게 계속 불을 때서 덥혀 놓은

떡 시루를 지게에 지고 겨울 찬바람에 식을 새라 부지런히 방앗간으로 달려가야 했었지,,

한 해는 어떤 집에서 더 맛나고 찰진 떡을 해 먹는다고 찹쌀로 떡을 하려 했는데

찰밥 찐 것이 잘 뭉개지지가 않아서 밥알이 더덕 더덕 붙은 가래떡이 되기도 했었고,,


떡을 하는 날이면 온 동네 아이들은 모두 방앗간으로 몰려들어

더운 김이 나는 흰 가래떡이 뽑아져 나오는 것도 구경하고

그 날만은 모두 인심이 좋아져서 떡 가래도 하나씩 얻어먹기도 하고

텅~텅~텅~돌아 가는 기계소리, 떠들썩한 어른들의 부산함 속에서  마냥 신나는 날이었지,,,

 

떡을 해다 굳혀서 썰어 놓고 나면

콩을 불려 맷돌에  갈아서 큰 가마솥으로 하나 가득씩 끓여서 두부도 만들고

콩이나 쌀을 볶아 다식꺼리도 만들어야 했지,,

 

콩 볶아 갈아서 고운체로 쳐서 콩 다식 꺼리 만들고 ,

쌀도 볶아  갈아 쌀 다식 하고 ,

초여름에  따다 말려 가루 내어 놓은 노란 송화 가루는 부드러운 송화다식이 되고,

검은깨를 볶아 곱게 갈아서 고소한 깨다식도 만들고,,

고아 놓은 조청으로 다식꺼리를 반죽해서 떡살처럼 예쁜 무늬가 새겨진 다식 틀에

기름을 살짝 찍어 바르고 다식 반죽을  넣고 손으로 꼭꼭 눌러서

윗부분을  반듯하게 마무리 하고 박아내면 예쁜 무늬가 선명한  

고소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고운 색의 다식이 만들어 졌고,,


어른들이 분주하게 이런 저런 준비로 바쁠 때 어린 나는

할머니께서 새로 지어 장롱에 넣어 놓은 고운 한복이 어서 빨리 입고 싶어서

하루에 한 번씩은 몰래 꺼내 입어보고 좋아라 했었고

신발이라도 새로 사다 주신다면  그것을 밤에 잠 잘 때도 머리맡에 놓고 자곤 했었는데,,,,


기다리던 설날이 되면 동네에 있는 친척 남자분들은   다 모여서

서열대로 집집마다 다니며 모두 함께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떡국을 나누어 먹고,,

분주한 어른들 틈새에서 어린 나는 그야말로 젯밥에만  맘이 끌려서는

차례올리기 전에 과일 꽁다리 얻어 먹는 맛은 또 얼마나 좋았는지,,

 

그 때는 과일이래야 사과 배 곳감 밤 대추가 전부 였는데

그것도 명절이나 제사때나 되어야 과일을 구경 할 수 있었다

과일이 귀하다 보니 딱 제사에 올릴 갯수만 사오시는지라 아무리 먹고 싶어도

차례가 끝날때 까지 기다려야 했고 진설 하기 위해서 사과 배 양쪽을 도려 내는데

그 땐 그게 꿀맛 같이 만났었다.

동네에 함께 차례를 모시는 친척 집안이 10여호 되었는데

우리 집은 큰 댁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냈는데 어린 내가 하는 것은 없었어도

분주한 어른들 따라 새벽부터 일어 나서는 동동 거리다 보면 배는 고픈데

먹을거리는 푸짐한데도  차례올리기 전에는 입이 부르튼다고 손도 못 대게 해서는

어느 해는 먹고싶은 것을 참지 못하고  차례상에 올려 놓은 떡국에서

어른들 몰래 떡국 떡을 한 쪽 집어 먹었는데 거짓말 처럼 그 날 바로 입술에 물집이 생긴적이 있었다.

 

돌아 가면서 지내는 차례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늦게 맛있는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산소에 성묘 하고 나면 젊은 남자 청년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제일 나이가 많은 어른이 사는 댁부터 차례로 세배를 다니기 시작했지,

세배 하러 오는 분들도 때로는 여럿이 모여서 함께 오기도 했었는데

세배를 받는 집에서는 세배 오는 사람마다 그냥 맨입으로 보내지 않고

간단한 술이나 음료(감주 수정과)등, 장만해 놓은 음식을 대접 하곤 했었는데

그 시절에는 부엌이 밖에 있어서 겨울에는 물 일 하는 손이 쩍 쩍 얼어붙게 추워서

세배오는 분들 대접할 음식을 안방에 붙어 있는 윗방에다 들어다 놓고

덥혀야 할 것은 화롯불에 올려 놓고 손님 대접을 했었다.

세배 오는 분들이 초 사흘 까지는 계속 있어서 어른들이 계시는 집안에 며느리들은

지금처럼 정초에 친정 나들이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고 하루종일 앉을새도 없이 

손님상을 차렸다 치웠다 해야 했엇고,, 

 

어린 우리들도 이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세배 다니곳 했는데 

옛날 그 시절엔 미신이랄까 금기시 하는 것이 많아서  

여자는 정초에 남의 집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어린 여자 아이들도

나이가 열 살 쯤 되고 부터는 세배 가는 것도 삼가야 했었다

50년대,, 전쟁 후에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금보다 훨씬 재미나게 살았던 것 같고

사람 사는 정이 많았었고,,,,돌아보면 모두가 그리운,아름다운 추억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