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화에서 문정왕후역을 맡고 있는 배우 김미숙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성부부인 이씨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이 해는 조선 유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실록에는 ‘천성이 강한(剛狠. 굳세고 강직하다.)하고 문자를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반가의 여성들은 대부분 언문이나 천자문 등 소통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자만 체득했을 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또 혼인하면 ‘남존여비(男尊女卑)’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원칙에 따라 규방에 갇힌 채 가사노동에 종사하면서
오로지 남편에 대한 순종, 출산과 양육에 몰두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걸어야 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남성의 권리나 지위 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을 업신여기는 관행.
삼종지도三從之道,,,,여성이 반드시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 옛날에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르라는 뜻으로 하던 말이다.
여필종부 女必從夫,,,,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르고 좇아야 함을 이르는 말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받았던 엄혹한 세월 속에서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민회빈 강씨,명성왕후 등 재기발랄하고 슬기로운 몇몇 여성들은
사회의 완고한 벽을 뚫고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그 가운데 특히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 윤씨는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축적된 조선의 모순을 타파하여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문정왕후의 학문의 경지는 중종과 논어를 강론할 만큼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한다
그녀는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펼치며 공론을 일삼던 사림을 척결하고
불교부흥과 신분개혁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조선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이런 그녀의 시도는 비록 미풍으로 가라앉았지만 유교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남녀차별의 완강한 분위기 속에서
측천무후에 비견되는 여성 권력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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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문정왕후에 대한 좋은 평가 이다
그러나 후세의 알려진 문정왕후에 대한 기록은 이러한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것 같다
과연 그가 알려진 대로 악행을 일삼고 임금을 능가 하는 권력을 휘드른게 사실인지 아닌지 이제 와서 명확히 가릴 수 없겠으나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은 한번 헤집어 보고 싶다
문정왕후는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세번째 부인이다
중종임금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폭정으로 페위 된 후 에 반정 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려진 인물이다
성장과정에서 정식으로 왕세자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닐뿐더러
반정공신들의 의해 추대된 왕이니 반정공신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임금노릇을 했다고 보기 어려운 왕이다
조선 7대 임금인 수양대군은 어린조카를 몰아내고 보위를 찬탈하는 반정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도 반정 주도 세력인 신하들이 드세게 어필하는 일을 겪기도 했는데
왕이 아닌 신하들이 반정 주도 세력이었던 중종 반정
반정 공신들이 중종을 왕위에 올려놓고 첫번째로 한 일은 왕후인 단경왛를 페위하는 일이었다
치마바위라는 전설을 만들기도 한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과 함께 폐출된 폐비 신씨의(연산군의 부인) 오빠이자
임사홍과 더불어 갑자 사화를 주도했던 연산군의 핵심 측근이었던 것
. 반정으로 인해 신수근은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었고 .
반정 세력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고 폐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결국 폐위되고 만 것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반정세력이 자신들이 앉힌 임금의 세를 약화 시키고 기선제압을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중종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첫째부인 폐출후에 맞이한 둘째 부인은 딸과 아들 하니씩을 낳고 아들을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산후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세번째 계비로 맞이한 이가 문정왕후,
문정왕후가 입궁할 당시에 이미 궐내에는 훗날 인종이 될 원자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을 둔 경빈 박씨를 비롯해
반정 공신의 세를 등에 업고 기세 등등한 후궁들이 여럿이 있었으니
한미한 친정 가문을 둔 문정 왕후가 궐내에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절치 부심 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기 전에는 모후를 잃은 어린 세자 양육에 정성을 들이기도 해서
그 세자의 외숙되는 이가 문정왕후의 세력이 되어 주기는 하였으나
폐출의 위기도 있었고 대를 잇는 다는 대의 명분이 있는 아들도
입궐후 17년 후에(1517에 입궁~1534에 경원대군 출산) 낳게 되었으니 중전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편할 날 없는 세월이었을 것,,
중종 사후에 즉위한 전처 소생 임금이(인종: 제위기간 1544년 11월~1545년 7월) 일찍 요절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긴 하였으나
유약 하기만한 그 아들도 겨우 열 두살
중종은 후궁소생을 비롯헤 9남 11녀의 자식을 두었고
반정 공신들의 서슬퍼런 세력을 등에 업은 후궁들의 소생도 무럭 무럭 자라고 있었으니
열두 살 어린 왕은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전 조 에 이어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臣權이 기세 등등해지는 세상이 되어가니
이런 상황에서 대차고 똑똑했던 문정왕후가 팔 걷어부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훗날 19대 숙종임금은 열네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숙종임금의 모후인 명성왕후도 대차고 드센 성품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모후의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친정을 선언하고 통치를 잘 해냈던 것으로 보면
스무살까지 문정왕후의 그늘에 있었던 명종임금도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니
남편에 이어 아들도 임금노릇을 잘 하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걸 보면서 더욱 문정왕후의 세상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도 후사가 없어 그 대를 이은 14대 임금은
문정왕휘의 혈손이 아닌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 덕흥군의 셋째아들이었다, 그가 바로 선조 임금
그러니 후대의 임금을 비롯한 왕실과 지배세력이 문정왕후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기록해
전 조의 업적을 폄훼,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의심해 볼 수도 있다
문정왕후는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 사대부라 일컬어졌던 지배계층에 반해 승유억불勝儒抑佛이라는 불교반대론을 누르고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실현하여
남성중심 유교중심 시대였던 조선 사대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후사도 자신의 핏줄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얼어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는 다는 자존심 쩔고 폼생폼사 했던 알량한 양반님네들이
자신들 보다 능력이 뛰어났던 시대의 여걸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이런 상황이니 후세의 역사의 기록이 문정왕후에게 우호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승유억불(勝儒抑佛) ::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눌렀던 정책
옥중화에서 정난정 역을 하는 배우 박주미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성은 태어나면서 아비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
여필종부女必從夫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
철저한 남성중심적인 시대에
남성에겐 일부다처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허용되었지만
여성에겐 칠거지악 항목에 투기 하면 안된다는 것도 들어 있으니
시대적 상황이 여성에게 얼마나 불리한 여건 이었는지,,짐작해 볼 수 있다
삼종지도三從之道 니 여필종부 女必從夫 니 하는 것으로
철저히 남성의 부속품 쯤으로 만들어 놓은 그 시대에
보잘것 없는 신분으로 (첩의 자식) 태어나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정경부인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흔치 않은 인물
여성에겐 배움의 기회도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고 신분의 제약도 많았던 조선시대에
권력의 흐름의 맥을 정확히 집고 과감히 그에 편승할 줄 알았으며
이재(理財 )에도 밝았던 듯 하니 그녀에게 불운이라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났었던 것뿐
본처를 독살하고 권력을 등에업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등으로 그녀를 흑화 시킨 것은
자신들보다 뛰어났던 천출 여성을 거꾸러 트리기 위한 모함은 아니었을까,,?
남성우월주의 시대였던 만큼 또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오직 남성에 의해서 결정되던 시대이니
정난정의 악행도 과장되고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 지는데,,
여성들이 똑똑해지고 잘나가는 것을 아예 싻을 자르고자
잘난 정남정을 천하에 악녀로 요부로 둔갑시켜 희생양으로 삼았지 않았을까,,?
나쁘다던 광해군도 재 조명해서 긍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는 요즘인데
정난정도 문정왕후도 재조명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여지가 없는 것인지,,,
이 글을 작성한 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 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으니
명확한 것은 알길이 없고 할머니가 보는 세상이야기 속에 역사 비틀어 보기 한자락 깔아 본다
아주 오래된 조선 시대가 아닌 지금 세상에서도 기록되고 보여지는게 전부 다가 아닌게 하도 많은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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