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길거리 천 것 보다 더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 이선李愃

L일순 2014. 12. 16. 10:00

 

 

여기에 실린 모든 사진은 비밀의문 드라마 홈에서 가져 왔다

 

 

조선왕조 21대 영조대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

 

조선왕조에서 최장기 집권을 했던 영조대왕은 애석하게도 정비에게서는 아들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아들 둘이 있었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정빈 소생)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인 10세에 요절했다하고

 

둘째 아들  영빈 이씨의  소생인 이선은  영조가 마흔 둘일때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당시 장남 효장세자가 사망한지 7년이나 되었던 터라 아버지인 영조와 왕실의  기쁨도 컷을터,

 

조선시대에 42세면 할아버지도 될 나이니 사가에서도 큰 경사였을 것인데 하물며 왕손이었음에랴

이후 다른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아  영조는  아들 세자가 읽을 책을  직접 필사해 주었다고도 하니  그 지극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도 있는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영조 임금 나이 40세가 넘어서 본 아들이라 그랬는지  어린 나이인 아기때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한다

후일에 있을 비극을  전혀 모른채로 그는 임금의 단 하나뿐인 아들로 귀히 자랐을 터인데,,

 

 

 

 

 

 

 

훗 날 아버지인 영조임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흉흉한  기록들이 있는 걸로 알지만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어떤 기록이 맞는 것인지 알수 없고 이제와서 진위를 따질 수도 없지만

왜 영조 임금은 아들을 그런 모양새로 죽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금지 옥엽 으로 자라 한나리의 국본이 되었고 임금 다음으로 귀한 몸이 었던 그가

세자로서의  최소한의 위엄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게 만든 이유가 무었이었을까

 

아무리 아들이 미웠어도

또 노론이라는 정당의 힘에 휘둘려 어쩔수 없이 아들을 죽게 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시대 역사를 통털어서 봐도 어떠한 죄인에게도 시행되지 않았던 참혹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폐세자를 만들어 귀양을 보내 위리안치를 할 수도 있었겠고

바로 죽여야 했다 해도 사약을 내릴수도 있었을텐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임금의 아들이었고 나아가 왕세자였던 "국본"이라 칭했던 귀한 몸이었거늘

그 죽음에 있어서는 국본의 품위는 커녕 길거리 노천에서 아무렇게나 딍굴어 죽었던 천민보다 더 천하게 죽었으니,,

 

ㅡ실제로 조선왕조 승정원 일기중에서 사도세자가 죽었던 임오년  사도세자의 대한 부분은 후대의 정조대왕이 모두 지워 버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의 '한중록" 이라는 일기체의 기록에서 전해진 것 같으나

혜경궁의  친정아버지가 세자의 죽음을 오히려 부추겼던 기록들도 있으니

혜경궁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가감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했을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남편의 죽음을 바라본 자신이나 친정집안을 합리화 시키려는 의도로 씌어지지 않았을까,,

기왕에 남편은 구할 수 없었으니 아들이라도(훗날 정조)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더 해져서ㅡ

 

 

 

 

 

1762년 윤5월 13일(음력) 운명의 날, 영조는 창덕궁 휘녕전(徽寧殿)으로 사도세자를 불러서 

 

 칼을 주면서 자결을 명했지만 세자가 거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뒤주를 가져와 가두어 죽이기를 청했고, 결국 세자는 좁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절명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사약이 내려지지 않았으니 뒤주속으로 들어갈때만 해도 세자는 그 좁은 뒤주속에서 죽을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의식이 있는동안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한다

 

그러나,,세자가 절명하는 날 장인 홍봉한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를 살려낼 수도 있는 이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것,

 

11살이었던 세손(훗날 정조)만이  영조 앞에 엎드려 “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다

 

 

 

 

 

 

 

음력으로 윤오월이면  양력으로 7월쯤 될터인데 한참 더운 여름철이다

좁은 뒤주안에 집어넣어 뙤악볕이 내려쬐는 마당 한가운데 두었으니  배가 고픈거 보다 갈증은 얼나나 심했을거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생리적인 현상 , 그걸 참지 못해 그안에서 똥 오줌을 다 배설했을 것이니

그러면서 갈증에 허덕이며 죽어갔으니  금지옥엽인 세자였던 몸으로 나이도 어렸던 것도 아니고 지각이 있는 스물 여덟 이나 되었으니

그가 스스로 느꼇던 참혹함은 살아서 지옥에 쳐박힌 거나 다를바 없었지 않았겠나

 

그 좁은 뒤주안에서 자신의 오줌으로 갈증을 달래려 애쓰는 것을 보다못한 보초서는이가 뒤주위에 오줌을 누었다 한다

그것이라도 받아 먹으라고,,

그러나 영조 임금은 뒤주위에 오줌을 눈 사령을 잡아 죽였다 한다 ,,

먹을 것을 제공 했다고,,

 

 

 

 

무엇을 얼마나 크게 잘못했길래 그런 식으로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과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가게 했는지

사도세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도 많았는데

왜 그토록 참혹하게 죽어가게 햇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세자는 폐위시켜 폐세자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임금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몸인데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게 했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죽이고 나서 영조임금은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다

思悼 의 한자 뜻이 생각할思 서러워할,,생각할수록 서럽다 라는 뜻이니 

참혹하게 죽이고 나서 서럽고 서럽다고한  아비인 영조의 마음은 어떤 모양으로 생겼었을까,,

 

나라의 정승으로 지내던 사람도 반역만 아니면 그 죽음을 신체를 손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배려했다는 기록도  많이 있던데,,

 

영조 임금은 아들이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8일이나 되는 동안 아들을 정말로 죽여야 할까,,

혼만 내고 꺼내 줄까 갈등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님 신하들에 힘에 밀려서 뒤주속에 집어넣으면서 신하들이 그만 용서해 주자고 주청할 것을 기대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사진 : SBSS비밀의 문 홈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