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사적 123호
명정전:: 국보 226호
ㅇ 보물
- 제384호 홍화문
- 제385호 명정문 및 행각
- 제386호 옥천교
- 제818호 통명전
- 제846호 풍기대
- 제851호 관천대
-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
궁궐 안쪽에서 본 홍화문 보물 제 384호
홍화문은 창경궁에 정문으로 성종 15년(1484)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고 현재의 문은 광해 8년(1616)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옥천교에서 바라본 명정문제385호
창경궁 옥천교는 1483년에 건립된 것으로,
다리 아래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들어 지금도 남쪽으로 흘러간다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명당수가 흐르는 다리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궁궐의 다리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다리는 복원이 되었으나 물길은 복원하지 못했다 한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여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되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영조는 명정전 월대 위에서 한양을 중심으로 500리 이내 지역의 백성을 불러,
지금의 구리시에 위치한 칠릉의 비를 세우는 공사와 능으로 향하는 왕의 거둥이 민간에 폐를 끼치는지 물었다.
또한 제주에서부터 산릉(山陵)의 공사에 지원하려고 올라온 백성들을 명정전에서 만나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명정전은 나라를 통치하며, 동시에 민심을 보살피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명정전 국보 226호
자료를 찾다보니 언제였는지 명정전이 이런 모습이었던 때도 있었네요
뜰에 잡초가 우거진채 방치되어 있었어도 전각이 훼손되지 않은게 다행으로 여겨지네요
명정전 봉황 답도
이곳은 임금의 어가가 다니던 곳
임금님의 어가가 이곳에서 부터 움직였다면
임금님은 건물 안에서 나와 바로 연에 올랐을 것이니 땅을 딛고 걷는 일은 없었을 것 같은 생각,
명정전에 문살은 다른 궁궐에서 볼수 없는 꽃살 무늬로 아름다움을 더 했다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전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짰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장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장을 하였다
함인정 천장에 동 서 남 북 방향으로 편액으로 걸려있는 도연명의 사시(四時
춘수만사택 (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추월양명휘(秋月楊明輝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따듯한 봄날 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봉우리에 걸쳐있네
가을달빛은 밝게 빛나고
겨울 고개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환경전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었고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 이었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지금은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서 볼 수는 없지만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경춘전 현판은 순조임금의 글씨라고 한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며
건물 뒷편 북쪽은 여러 대비들의 침전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성종임금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경춘전
영조 28년 (1752년)경춘전에서 정조가 태어나기 전 해에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이 태몽을 기념하여 경춘전 벽에 꿈에서 보았던 황룡을 그렸다고 한다
훗날 정조는 아버지의 이그림을 볼때마다 눈물을 쏟았다고
사진은 없지만 명전전 옆에 있는 문정전 앞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곳이라 한다
창경궁이 정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었지만 숙종에서 정조까지 이곳에서 정사를 보고 생활햇던 것으로 보인다
제818호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건물 왼쪽 서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연못을 두고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중심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의에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저주물을 파묻은 곳이
통명전 주변이라 하니 인현왕후도 통명전에 거처하지 않았을까,,추측해 본다
언덕위에서 본 통명전
188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임금이 거처하기도 했다한다
대궐의 전각중에 임금이나 왕비가 거처하는 전각은 "전殿"이라 했다는데
양화당에 임금이 머물러 있었던 것 보면 전쟁으로 궁궐이 많이 망가져 있었던 듯,,
영춘헌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서행각으로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는 영조11년 (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 (1790)6월에는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 6월 승하 하였다
순조 30년 (1880)1일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 하였다
이런 기록이 있지만 상궁 내인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 내부와 뒷쪽
지금은 숲이 울창한 이곳은 통명전 양화당 뒷쪽 언덕위인데
사진에서 보이는 웬쪽으로 높은 곳에 자라잡아 전망이 좋은 이터는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이 있던 곳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앞쪽으로 멀리 아버지 사도 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으며
뒷편에는 아름다운 계단식 후원이 있었다 한다
한중록의 산실이기도한 이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근대식왕실 도서관인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자경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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