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의 창건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신라 시대 말기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실질적인 봉은사의 시작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선릉 옆에 있던 견성사(見性寺)를 중창하면서 부터로 보고 있다.
1562년 명종 1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처음에 봉은사는 왕릉의(헌인릉) 수호와 제례 담당이 주 역할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반 사찰로 커졌다.
상대적으로 한양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왕릉의 수호를 담당하였고,
선종의 으뜸 사찰로서 과거 제도 중 승과를 담당하기도 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절은 1939년 대화재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2차례 대부분의 전각을 소실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특히 한국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으며 피해를 복구하는데 40여 년이 걸렸다.
戰火를 겪으면서 소실된 것도 있지만 근래들어 신도는 늘어 나고 예전에 지어진 전각은 좁으니
헐어내고 새로 지은 것도 많다
오래된 전각은 그자체가 역사이고 문화재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옛날 것을 해체해서 경내 한곳에 복원해 옮겨 놓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휴대용 조그만 디카로 찍은 것이라 사진이 좀,,,,,,
대웅전
부처님 오신날 저녁 경내에 연등에 모두 불을 밝히면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대웅전 뒤에 이곳에 올라 경내를 내려다 보는게 가장 아름답다
종루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아셈빌딩 일 듯,,,
아셈빌딩이 들어설 때 몽은사 신도들은 무역센타 앞에서 집회를 갖기도 했었다
저 높은 건물이 들어서면 유서 깊은 전통 사찰 이미지가 훼손 된다고,,,
예전엔 봉은사 앞에 한전 건물 있는곳까지 모두 봉은사 땅이었다는데
이래 저래 도심 한복판에 있는 전통 사찰은 협소해지고 번거로워지고 사방으로 높은 빌딩에 둘러 쌓였다
봉은사: 판전
판전 안에는 대방 광불화엄경의 목판을 비롯하여 금강경 유마경 등 13종류 경전의 목판 3,749장이
보관되어 있다
판전 현판 글씨를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합니다
ㅡㅡ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 글씨체라고,,,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
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ㅡㅡ
판전 현판,,(추사:김정희)
봉은사 경내 서쪽에 있는 이곳은 70대년쯤 법정스님께서 머무시면서,,(다래헌)이라고 이름 지어 졌던 곳이다
그때는 사립문에 초가집 이었는데
다래헌이라는 표시는 보이지 않고,,,대문 안쪽에 있는지,,)
번듯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여름장마 갠날 외출했다 비 맞으라고 뜰에 내 놓았던 난 화분 때문에
볼일도 다 못보시고 급히 돌아 오셨다는 이야기기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고
유언에서 머리맡에 신문을 배달해 주던 소년과의 인연도 이곳에 계실때 맺어진 인연이라고 들었다
스님이 이곳 봉은사 다래헌에 계시던 때는 그 곳에서 서울 도심으로 갈려면 나룻배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오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먼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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